인도

더위

늦깎이1 2022. 5. 9. 12:06

요즘의 더위는 한국에서 맞는 더위완 본질적으로 다르다. 아침에 일어나 문을 열면 확 엄습하는 열기가 온 몸을 감싼다. 보통 37도를 넘기니 건식 사우나에 막 들어온 것과 같다. 조금만 걸어도 이내 땀이 맺히고 겨드랑이와 등줄기가 금방 젖는다. 한 낮이 되면 보통 42도에서 45도까지 올라간다. 아직까지는 건기에 속하니 그래도 견딜 만하단다. 그러나 나에겐, 용광로 속처럼 따가운 이 햇살부터 견딜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다 보니 7월부터 본격적으로 들이닥칠 몬슨의 무더위는 또 어떤 얼굴로 나에게 다가올지. 한국도 지금은 장마가 시작되는 계절이라니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에도 자연의 변함없는 질서는 세계 곳곳에서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덤덤한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다.

 

오늘은 수요일이지만, 평일처럼 재택 근무하는 날이다. 파견교사는 주당 20시간미만의 수업을 해야 하는 관계로 나는 매주 주말반 토일, 그리고 주중반 화목 온라인 수업을 담당하기로 했다. 그런데 지금은 하루 6시간씩 주당 24시간의 수업을 한다. 다른 한 분과 주중반 팀 티칭을 하는데 한 분기를 마치고는 변화를 주기 위해 내가 먼저 화목 수업을 다 하고 그 이후는 쉬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월금을 휴일로 정하고 수요일만 유일하게 수업 없이 재택근무를 한다. lockdown 치하의 이런 날이 가장 무료하다. 주로 수업 준비를 하거나 넷플릭스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이 의무적인 일은 억지로 하는 기분이 들어 이유 없이 싫은 것이다.

 

전례 없는 더위와 함께 무료한 이 순간을 지탱할 수 있는 묘수가 없을까. 더위로부터 탈출하는 묘수는 특별한 비기가 없었다. 이열치열이 최고였던 듯싶다. 인도 오기 직전의 어느 무더운 날, 나는 이열치열을 작정하고 운천 저수지를 열 바퀴 돌았다. 그 더위의 열 바퀴는 젖어가는 셔츠의 땀줄기 무게만큼씩 인내를 요구해왔지만 난 묵묵히 참을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달려간 샤워기 밑에서 내지르는 우와, 하는 탄성, 그리고 벗어부친 더운 몸 위로 쏟아지는 짜릿한 해방감은 그 어떤 엑스타시와도 비교할 수 없을 듯했다. 그렇지. 그렇게 더운 날, 난 나만의 방법으로 더위를 견뎌내곤 했었지. 어디 그 뿐이었으랴.

 

너릿재 옛길. 그곳은 더위보다도 본능적인 끌림이 있던 곳이었지. 탈진되어 맥 빠져있던 내 영혼 속으로 왕복 8km 내내 스며들어 오랜 시간 머물러 주었던 맑은 기운. 솜씨 좋은 바리스타가 내온 커피를 마시면 진한 커피 향과 더불어 입 안에서부터 온 몸으로 번지는 개운한 풍미. 그런 뒷맛이 바로 날 잡았어. 오늘 한 일 중에 가장 잘 한 일이야, 를 종일 되뇌었지. 수원지 입구에 주차하고 길을 나서면 초입에서부터 불어오는 이끼 묻은 바람. 흐드러지게 핀 수국, 옥잠화, 맥문동을 만나고 나면 지천으로 피워대던 개망초 사이로 언뜻언뜻 시내 전경이 내려다 보였지. 늦가을 애기 단풍의 선명한 핏빛은 황홀한 탄사를 자아냈고 이제 막 차가워지기 시작한 소슬바람과의 끝없는 대화가 육십을 훌쩍 넘은 나에게도 어색하지 않은 그런 곳. 양 볼이 벌써 두툼해진 살찐 다람쥐들이 월동 준비로 바쁜 계절의 너릿재 정상은 늘 한 두 명의 등산객이 머물러 있어 그저 지나치기엔 좀 아쉽고 적당히 평온함을 느낄 수 있었지.

 

당초 걷기 좋은 곳으로 알려졌던 이 명품 숲길이 어느 날부터인지 자전거 전용도로가 되면서부터는 가끔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봤고, 실제로 관할 구청인 동구청에 민원을 넣어봤지만 시정이 되지 않은 채로 지금에 이른걸. 그렇게 전혀 시빗거리가 되지 않을 인생사에 잠깐 머리를 맡기며 생각 없이 내려 가다보면 어느새 소아르에 닿고. 지역 미술대학 교수가 사재를 털어 세웠다는 갤러리. 커피와 음식 값이 제법 비쌌지만 그것은 그런대로 이유가 있어보였지. 빨간 옷을 차려 입은 아줌마가 캐리어를 끌고 비행기 타러 올라가는 구성물. 고개를 쳐들며 계단을 오르는 주인공의 오만한 모습은 바로 이 시대의 껍데기들을 상징하는 익살스러운 모습은 아니었을까. 얼핏 지나가는 순간의 머릿속 기억들만으로도 이처럼 선명한 그림이 재현될 수 있을 만큼 그곳은 자주 다녔다는 반증일진저. , 나는 그곳엘 다시 가고 싶다.

 

더위가 계속되니 날씨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인도 생활은 한 겨울 제외하곤 더위를 잊을 수 없는 형편이다. 12월과 1월정도 반짝 추위가 왔다 금방 더위가 다시 오는 기후이다. 그런데 그 짧은 기간에 지나가는 인도의 추위는 예상 밖이다. 아마도 노상 맞는 더위 탓에 상대적으로 느끼는 추위일 터. 대리석으로 된 방바닥이 맨발로 걷기에 너무 시리다. 그리고 따로 난방이 없으니 전기담요 없이는 편안한 잠을 이룰 수 없다. 조금 있으면 몬슨이 온다. 내가 과연 몬슨을 경험할 수 있을지...가급적이면 경험하지 않고 귀국하려는 계획을 세운 바 있으나 그대로 관철될지 알 수 없다.

 

건조하고 더운 날씨에 에어컨도 엉망이다. ‘general'이란 브랜드인데 창문형인데다 굉음을 낸다. 효율이 형편없다는 얘기다. 그래서 매일 노심초사하면서도 거의 하루 종일 에어컨을 가동한다. lockdown 치하의 일상이다. 오전과 오후 잠깐 더운 바람만 나왔다가 다시 찬바람으로 환원되곤 한다. 이렇게라도 올 여름을 견딜 수 있기를 바랄뿐이다. 저효율 에어컨이 종일 가동하면서 발생시키는 전기요금은 얼마나 극적일꼬. 허나 난 아직까지 깜짝 놀랄 만큼의 전기요금 청구서를 받아본 적이 없다. 지난 달 청구서는 건너뛰었고 누적분이 이번 달에 덤터기를 씌울 것으로 예상되지만 예상 수치를 가늠할 수가 없다. 내가 이제껏 경험한 인도의 이상한 일에 대한 원인과 결과는 나의 예상을 항상 빗나갔었다. 그러니 전기 요금 역시 나를 크게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냉장고는 LG이지만 인도답다. 자동제상 기능이 없어 가끔 냉동실 성에제거 버튼을 눌러줘야 하는데 처음 몇 달간은 그것을 찾지 못해 애를 먹었다. 겨우 찾은 버튼을 누르자 몇 시간 후 바닥에 흥건히 물이 고였다. LG가 이 모양이라니. 그래서 지금은 규칙적으로 누른다. 냉장고도 이곳 날씨에는 진땀을 흘리며 저렇게 놓여 있다. 냉장실 기능을 믿지 못해 설정 온도를 더 낮췄더니 이젠 성에의 양이 크게 늘었다. 한국 빵을 15일 정도 예상하고 주문해 먹는데 그 중 2-3개는 곰팡이가 슬어서 버려야 했다. 그래서 일정 양은 냉동실로 가야 한다. 냉동실이 상대적으로 비좁아지기 시작하자 거기서 제일 먼저 얼음을 퇴출시켰다. 더운 날씨에 따라 특화 설계를 가미해야할 인도 향 냉장고 상품기획 담당자가 이런 상황을 간과했을 리는 없을 터, 냉동실과 냉장실이 반반인 냉장고가 아니다. 아마도 마케팅 정책에 따라 customized spec으로 추가된 가격의 인도 향 대신 싼 범용 냉장고를 설치한 landlord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처음 이 집에 와보니, TV와 냉장고 그리고 에어컨이 전부였다. 물론 침대와 붙박이 옷장은 갖춰져 있었다. 처음부터 TV는 전원을 꺼버렸다. 무용지물이 된 셈이다. 1평도 되지 않는 주방 테이블은 깨끗했다. 조리 기구나 장비가 전혀 갖춰지지 않아 난감했으나 알렘이 도와주어서 두 세 번의 장보기 끝에 필요한 자급자족의 틀을 갖추었다. 먼저 전자레인지와 induction cooker를 샀고, 이어서 커피머신과 그라인더 등을 갖추면서 완벽한 자취생활에 들어갔다. 세탁기는 처음부터 설치를 고려했지만, 중도 포기하고 말았다. 수도 파이프를 연결해야 하는 문제에 봉착한 것이다. 샤워기 호스조차도 설치를 거부한 landlord가 세탁기 설치를 위한 이 작업을 허용할 리가 없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옛날 세탁기 없던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 가끔 마당에 큰 고무 다라를 늘어놓고 이불을 비롯한 온갖 묵은 빨래를 하시던 추억을 떠올리면서 난 여기서 인도의 묵은 때를 그 때 모습 그대로 잘 씻어내고 있다. 그러다 문득, 아스라한 기억의 끄트머리쯤에서 갑자기 떠오른 생경한 감촉은 한 동안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의 모습들 속으로 나이 든 날 데려갔다.

 

중학교 때였지 아마. 학교에서 돌아오니 마침 그날이 이불 빨래를 하는 날이었는지 꽤 너른 마당에 아줌마 몇 분이 우리 집 빨래를 돕기 위해 부산하였다. 대문을 열어준 어머니가 귓속말로 벌써 내게 특별한 일이 없으면 도울 것을 부탁하셨던 터라 옷을 갈아입고 마당에 나와 채비를 했다. 특별히 어려울 것은 없는 듯했다. 어머니 하시는 모습을 눈썰미로 기억하곤 그 중 한 다라에 첨벙 발을 담갔다. 그리고 이내 밟기 시작했다. 미지근했으며 부드럽고 미끄러운 감촉이 싫지는 않았다. 미끄러지기 쉬우니 조심하라는 어머니 말씀을 듣는 둥 마는 둥 한참을 발 등 주위에 닿는 젖은 이불자락과 물결 사이에서 노닐다 미끄덩거리는 물컹한 무엇이 밟히면서 난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라에서 뛰쳐나왔다.

 

삽시간에 모든 주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제일 먼저 내게 달려왔던 어머니는 우선 안전을 확인한 후 다라 안을 살피더니 허리를 굽혀 한 참을 휘저으며 젖은 이불자락 사이에서 아, 요게, 하시며 다리미 방망이를 꺼내 올리셨다. 의아해하던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파안대소로 바뀌었고 난 한 동안 방망이라는 어정쩡한 닉네임으로 불려야 했다. 모든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사실 난 자못 심각했고 몹시 겁에 질렸었다. 당시 나는 집에서 가까운 광주천에 여름이면 친구들과 같이 고기잡이를 즐겼다. ‘드렁이라고 불리던 큰 물고기에 놀라 꿈속에서조차 무서움에 떨던 시절이었으니까 그 고무 다라 안에서 미끄덩거리던 것을 순간적으로 드렁이로 착각했던 것이다.

 

방망이. 고희를 앞둔 우리들에게는 이게 좀 묘한 호칭으로 둔갑한 지금, 난 이제 인도에서 그 방망이조차 그리워한다.

 

그 고향의 집도, 동네 어귀에서 멱을 감던 광주천도, 사직공원 팔각정과 대나무 숲도, 그리운 어머니도 이제는 없다. 내가 떠나 왔지만 그들도 나를 떠났다. 이름도 바뀌었고 모습도 용도도 원래와는 사뭇 달라졌다. 지금은 아무 것도 서로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떠나온 나 혼자만 서운해 할 뿐이다. (20200510)

'인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직은 이해 곤란한 나라  (0) 2022.05.10
예측불허  (0) 2022.05.09
시스템1  (0) 2022.05.09
수업2  (0) 2022.05.09
  (0) 2022.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