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시스템1

늦깎이1 2022. 5. 9. 12:04

lockdown이 시작된 지 3달이 다 되어간다. 현재 인도의 확진자 증가 추이가 수그러들지 않는다. 하루에 만 명 안팎으로 늘어가며 현재까지 30만 명에 육박하는 수준이니 전체 13억 인구를 감안한다면 아직도 그래프의 끝은 그대로다. 꺾이질 않는다. 거기다 이 나라의 통계가 정말 믿을만한가.

 

도로 위의 차량은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더불어 공기 오염도 예전 수치와는 아직도 차이가 있으나 200을 넘길 때도 많다. 학당에 일이 있을 때 오며가며 살펴보면 소상공인과 개인 샵은 이미 대부분 문을 열었다. 문화원 내 '달그락' 식당도 이제 정상 영업을 한다. 국민 대부분이 먹고 살기 힘든 나라가 3개월 동안 모든 교류를 끊어놨으니 그들의 살림살이가 불을 보듯 뻔하다. 하지만 이제 교통이 복구되면 그 이후를 어찌할꼬.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할 많은 국민들을 가둬둘 수가 없으니 국가로서는 이제 실험적인 시도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코로나로 죽나 배고파서 죽나, 인가. 난 과연 이런 환경 아래서 1년 더 연장된 임기를 채울 수 있을까?

 

서류 작업이 많아졌다. PC 작업 후 다른 문서로 변환하거나 가공해서 보내고 저장해야 한다. 젊은 시절 회사에서 실무 작업을 위해 엑셀을 활용한 관련 컴퓨터 교육을 별도로 받기도 했지만, 당시 나는 회사에서 신임 과장 교육을 마치고 본격적인 관리자의 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으면 실무에서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지위가 올라가면서는 아예 그런 실무로부터 담을 쌓았다. 자료 요구, 분석, 회의, 자료 수정 또 회의의 연속이었다. 회사의 이런 시스템 덕분에 아마도 삼성의 실무자들은 빠른 속도로 엑셀과 통계 처리의 전문가들이 되어갔을 것이다. 때때로 실무자들의 키보드 작업이 부러웠지만 그건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만든 자료를 들여다보며 숫자 뒤에 숨어 있는 특정한 현상을 찾아 눈을 번뜩여야 했고 수정을 요구하거나 화가 치밀어 올라 서류뭉치를 뿌린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무식하고 한심한 행동이었다. 나중에 페북을 통해 만난 그들에게 정식으로 사과했다.

 

그게 지금 와서 이렇게 내 손발을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오프라인 수업을 할 때라면 슬그머니 다른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처리할 수도 있었으련만, 그런 꼼수도 불가능하니 이렇게 혼자서 힘들어야 한다. 필요한 작업은 거의 매뉴얼화 되어 있었으나, 온라인으로 업무가 전환되면서부터는 새로 하는 문서작업들이 대부분이었다. 인도인 담당자가 문화원에 출근하는 날에 맞춰 온라인 수업을 거기서 한 후 그 이후에 문서 작업을 배웠다. 온라인으로 하는 6시간의 수업은 오프라인보다 더 많은 에너지와 집중된 신경을 요구한다. 그래서 그에게서 배우는 문서 작업은 가끔 방전이 다되어 멈춰버리는 면도기처럼 나를 탈진으로 몰 때가 있었다. 그는 그 순간을 귀신같이 알아채곤 했다. 저장된 USB를 조용히 내미는 그에게 난 여러 번에 걸쳐 겸연쩍어해야 했다.

 

사실, 인도에서의 문서 작업은 내게 있어서 일종의 트라우마를 내포하고 있다. 모든 외국인은 2주 안에 e-frro를 신청해서 발급받아야 한다, 는 관문을 어렵게 통과하는가 싶었지만 첫 번째 시련이 왔다. 생각지도 않았던 서류를 요구했다. 석사 학위증을 요구해왔다. 온라인으로 발급받는 방법이 있다하여 해봤지만, 무인 발급에 필요한 본인 인증이 불가하여 발급받을 수 없었다. 정지된 휴대폰을 인터넷으로 들어가서 풀고 어쩌고 하면 된다고 누군가가 조언했지만 내 굼뜬 실력으로는 불가능했다. 궁리 끝에 현직에 있는 교수에게 유선으로 부탁하는 등의 소란 끝에 겨우 e-frro를 손에 쥐었다.

 

두 번째는 엉뚱하게도 은행 거래가 문제였다. 시티뱅크 어카운트를 개설하는 게 유리할 거라는 재단 담당자의 권유가 있었지만, 외환은행이 전신인 KEB하나은행 현재 내 계좌를 굳게 믿으며 그대로 출국했다. 와서 보니 KEB하나은행은 원과 루피의 환거래를 인정하지 않는 은행이란다. 어쩔 수 없이 달러를 송금하고 이를 다시 루피로 바꿔서 생활하고 있다.

 

세 번째가 가장 엉뚱했다. 역시 은행의 연락을 받았다. 느닷없는 PAN 카드 발급 통보를 보내왔다. 세금 관련 업무를 효율적으로 관장하기 위해 인도 정부가 PAN 카드 제도를 가동했고 그게 없으면 은행 거래를 정지시킨다는 거다. 기간도 길지 않다. 먼저 와있던 파견 교원들은 이런 벼락을 피했다. 알아보니 나부터 해당된다는 거다. 참으로 희한한 경우였다. 비난해봐야 속절없이 시간만 흘러갈 뿐이었다. 겨우 일정에 맞춰 업로드 해놓으니 며칠 안 돼 득달같이 뉴델리 모처에 마련된 사무실로 출두하라는 연락이 왔다. 가보니 거기는 민간회사였고 아마도 갑자기 증가된 PAN 카드 업무를 위탁받은 듯 엄청난 수의 인도인들이 북적거렸다. 몇 가지 서류를 제출했고 100 루피도 안 되는 수수료를 징수했다.

 

이제는 다 끝나는 듯했다. 삼사일이 흘렀을까, 나의 PAN 카드 서류가 리젝트 되었다는 이메일이 들어왔다. 이름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언급만 있을 뿐 구체적인 내용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고 이메일로 구체 내용을 요청해봤으나 특별한 반응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은행 계좌는 정지되었다. 찾아놓은 현금으로 생활하는 데는 큰 불편이 없었으나 나날이 불안만 가중되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쉬는 날 답답하여 올드 델리에 있는 레드 포트 관광을 하려 했으나 입장권 창구에서 또 거절당했다. PAN 카드가 리젝트 되었기 때문에 60배의 요금으로 입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놀라웠다. 어수룩하게만 여겨졌던 이들의 전산망이, 예상치 못했던 순간의 관광지에서 나의 의표를 찌르고 뒤통수를 난타했다. 참담했고 헛웃음만 나왔다. 러시안 룰렛 같은 이 난국을 어찌해야 할꼬. 어린 시절 동화를 다시 읽는 기분이었다.

 

인적 없는 첩첩 산중.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민가를 만났는데 거기 밖에 쉬어 갈 곳이 없었다. 대체로 주인공은 사연 많은 구미호가 등장하는 그곳에서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나왔었지. 그래. 그들의 정밀한 전산망을 믿어보는 거야. 이름과 관련한 자료 즉, 여권과 비자, 그리고 e-frro를 다시 업로드하고 모든 여백에 여권 영문 이름을 대문자로 굵게 표기했다. 그게 통한다면 그들의 휴먼 에러를 내가 입증한 셈이 된다. 실수가 없도록 정확히 입력하고 결과를 기다렸다. 예상했던 결과였다. 일주일 후에 정확히 정상 발급된 PAN 카드를 발송한다는 이메일이 왔다. 인도에서 나의 문서 작업에 대한 트라우마는 그렇게 왔다. 복불복인 셈이다. 그러니 나의 트라우마는 치유되지 않았고 여전히 앓는 중이다. 아마도 인도를 떠나는 날 치유될 듯싶다.

 

지금 현재도 당면한 문서 작업 하나가 pending 중이다. 계약이 1년 더 연장되었으니 비자 연장 작업을 전산으로 업로드해야 한다. 전산 작업이라니. 어깨 너머로 터득한 작업을 내가 할 수도 있으려니 헛된 희망을 잠시 가져본 적은 있었으나 이내 접었다. 내 가슴 속 꺼졌던 치기는 끄집어낼 수는 있어도 팔팔한 그때처럼 가동되리라 기대는 어불성설. 불을 보듯 뻔한 낭패. 나의 더듬거리는 손길을 내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아직 시간은 남아 있으니 우연을 가장한 어느 날 Ajay의 노련한 솜씨에 의탁해보기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여전히 치유될 듯싶지 않은 트라우마를 벗어나는 길은 그것뿐이다. 몇 번에 걸쳐 업로드하고 리젝트 당하면서 겪을 시행착오와 패배감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인도이니까로 위안을 삼는 그런 수순을 다시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20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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