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생각들

말에서 상처 입고 글로 치유하기

늦깎이1 2022. 5. 11. 00:53

지난주 열린 청와대 국무회의는 좀 특별한 일이 있었다.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은 물론 참석한 비서관들에 이르기까지 한복으로 회의장이 화사해졌다. 오랜 코로나 방역으로 결혼식·돌잔치 등이 취소되고, 관광객도 줄면서 한복 수요가 위축돼 우리 전통문화를 대표하는 한복 산업이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 상황을 고려한 것이다. 대통령은, “종사하는 분들께 조금이나마 위로와 응원이 되기를 바란다.""한복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생활 속에서 친숙하게 누리는 문화가 점차 자리 잡기를 바라며, 한복을 입고 모일 수 있는 일상이 빨리 다가올 수 있도록 코로나 백신 접종과 방역에도 만전을 기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어서 "한국의 문화에 세계가 열광하고 있다"라며 "K-팝과 K-드라마가 세계를 휩쓸고, 영화, 게임, 웹툰 등 한국의 문화콘텐츠가 세계를 매료시키고 있다"고 한류 열풍 성과를 소개하기도 했다.

 

사실 우리 일상생활 속 한복은 특별한 날 외에는 이미 국민들 속에서 친숙함을 상실하며 주변에서 점점 멀어져 왔다. 그저 전통의복의 한 분야로 남아있을 뿐이다. 신혼 초, 명절을 앞두고 피로연에서 딱 한번 착용했던 한복이 생각나 그걸 입겠다고 찾았을 때 휘둥글어지던 아내의 눈에 비친 곤혹스러움만큼, 한복문화주간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몰랐던 만큼, 한복 국무회의가 있었다는 사실이 특별하게 여겨질 만큼 우리 일상으로부터 오랫동안 소외되어 온 것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다. 비싼 가격도 그렇거니와 이미 바빠진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는 전통한복의 멋스러움을 그대로 건사·유지해낼 시간과 여유를 구가할 수 없는 일반 서민의 생활상을 반영한 결과이다. 불과 6,70년 전 한국전쟁의 피난민 대열 속에서 때 묻어 곤궁함이 베어났던 수많은 한복의 물결이 탈색한 사진 속에서도 뚜렷이 건재하고, 전후 일상으로 돌아온 시민들의 바쁜 옷차림 태반에 우리의 한복이 여전히 주류를 이루고 있던 것을 우리는 보고 있지 않은가.

 

옷 입는 게 그러할진대 하물며 의식주 전반의 변화는 말할 것도 없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주택은 물론 전답을 끼고 몇 대인가를 살아온 것을 우리 선대는 자랑삼아 얘기했었고, 반상을 가리지 않고 한번뿐인 혼례를 위해서는 단 반상기로부터 5, 7, 9첩 고급 반상기의 예단문화를 유지해왔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초가집과 기와집이 즐비했던 자리는 연이은 몇 차례의 아파트 재건축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지 오래다. 요즘 들어 한류 바람을 타고 한옥문화가 정책적 차원에서 전시 또는 지원 형태로 권장되고 있을 뿐. 물밀 듯이 밀려들어온 소고기, 닭고기 등의 육식과 냉동식품, 패스트푸드 류 음식들이 빠르게 대체해버린 식탁문화를 우리는 오랫동안 향유해왔다. 수입 소고기파동도 겪어봤다. 어린 시절 보릿고개와 꽁보리밥에 물린 기억으로 이 고장의 명물 무등산 보리밥집조차도 한사코 손사래를 쳤던 한 친구는 요즘 다시 비싸진 보리밥에 환호를 보낸다. 기름진 영양식 대신 비건을 비롯한 채식문화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지만 대세는 막을 수 없다. 바쁘게 뛰지 않으면 도태되며 맞춤식 편리성이 더한 일상생활의 변화에 전통 의식주 역시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미 사라져 흔적처럼 남아있는 옛날 문화도 엄연한 우리 문화의 범주에 속해야 한다. 그 역시 이전의 문화를 대체하며 지속해왔던 우리 역사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바뀐 일상생활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대다수의 주변 사람을 개탄스럽게 바라보는 시선도 있지만 그것은 시대를 착각한 편견일 뿐이다.

 

이런저런 상황을 맞아 국무회의의 특별 이벤트로 한복문화주간을 끌어들인 것은 그런대로 시의적절한 처사였다고 생각한다.

 

최근 한복 착용에 대한 에피소드 하나가 내 일상에 끼어들었다. 서로 나누었던 짧은 대화가 촉발시킨 불편한 감정은, 삶과 죽음에까지 이르렀던 상념의 벼랑 끝까지 날 줄기차게 끌고 다녔다. 허허로운 크리스마스이브, 밤새 대여섯 포장마차를 전전하다 동이 튼 새벽을 맞이했을 때처럼 파김치 몸에 정신만 말짱했다. 일상을 다시 회복한 것은 그로부터 두 달 정도 지나서였다. 마음고생이 컸던 만큼 혼자서 버둥거린 시간도 더 필요했다. 탈진을 이겨내고 마음을 추스른 것은 순전한 오기였다. 시간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신 덤으로 얻은 게 있었다.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거의 소통이 없던 동창생 중 하나였다. 저간의 사정을 나눌 수인사도 없이 용건부터 꺼낸 그의 말은 매우 사무적이었으나 난 최대한의 예의를 차렸다.

 

영어 회화하는 그룹이 있는데 관심이 있다면 같이 해주면 좋겠네. 매주 월요일 2시에서 4, 1주 하루, 마침 오늘이 수업하는 날인데 일정이 어떤가?

, 내가 지금 밖에서 식사 중인데, 어떡하지? 오랜만에 전화해서 얼굴도 한 번 보고...일단 가보고 싶은데 도저히 그 시간에는 도착불가야.

수업 끝날 때까지 아무 때라도 오면 돼.

오케이. 그럼, 3시 좀 넘어 도착하도록 할게.

 

다그치는 듯 조급히 진행한 그의 말투에 잠시 당황했으나 일단 가기로 했다. 우리 나이가 다 정년퇴직해서 자영업을 하고 있는 친구 빼고는 나름대로의 은퇴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을 때였다. 그래서 평소 소통이 없던 친구로부터의 연락도 반가웠다.

 

얼핏, 그를 언제 만나봤더라, 생각해봤다. 생각나는 게 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인가 맨 뒷줄에 늘 말없이 앉아있던 그가 외마디로 질렀던 딱 한 차례의 의미 없는 고함, 그리고 여럿 가운데 먼발치서 느끼던 희미한 기억 등이 가물거리듯 스쳐지나갔지만 그런 것들은 이제 내게 아무런 의미도 흔적도 없다. 어느 지방대학의 미술 교수로 퇴직했다지만, 그의 작품을 접해 본 기억도 없었다. 학창시절 그의 미술반 활동에 관한 어떤 기억도 남아 있지 않았기에, 미술교수란 친구의 귀띔에 잠시 의아했던 기억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미술반장으로 활발한 활동을 했던 나를 중심으로 한 추억 소환이었기 때문에 그동안 다른 길을 걸었던 내가 과문했던 탓으로 돌렸다. 어쨌든 그는 지금 나와 달리 다양한 친구들과 활발한 소통을 지속하고 있으며 우리끼리는 동사무소라고 부르는 동창회 사무실 회합의 고정 멤버로 알려져 있는 친구였다.

 

일반적인 그의 모습은 대충 그런 것 같다. 특이한 사실 하나로는, 동창회 카톡으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끊임없이 올리는 점이었다. 두세 친구들의 그런 행동에 한두 친구가 브레이크를 거는 듯 했지만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브레이크는 빈축으로 남아 수면에서 사라졌다. 부부간 세대간 계층간을 막론하고 정치적 견해란 획일을 주장할 수 없는 것쯤은 상식일 텐데 자신이 신뢰하는 특정 정파의 주장을 그들은 그렇게 마구 올렸다. 그마저도 인터넷상에서 떠도는 내용을 발췌해서 첨삭·가공했다는 의구심이 많은 성격의 글이었다. 그래서 또 올렸군, 하며 그저 패스해버린 경험을 공유하는 친구들이 많다. 쉽게 접할 수 있는 대동소이한 주장을 카톡에서 또 들여다보고 있자니 식상할 만하지 않은가. 남이 쓴 글을 쉽게 퍼 나르는 정도의 수고로 우리 사회의 여론이 경도될 리가 없지만 그들은 그걸 친구들 사랑방에까지 풀어놓았다. 젊은 날의 허세는 경쟁의 다른 모습으로 비추어질 수가 있겠지만, 나이 들어 친구들 면전에 뿌려대는 그런 행위는 봐주기가 좀 그렇다.

 

동창회 홈피 역시 사랑방에는 틀림없지만 카톡과는 좀 다른 측면이 있는 듯하다. 카톡은 사용하기가 용이해 손가락만으로도 대화가 쉽게 이루어지지만, 홈피는 아이디와 비번을 입력하는 별도의 절차에 문장을 구성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홈피 가까이엔 얼씬도 하지 않는다. 늘 카톡에만 등장하며 가끔 그렇게 빈축을 산다. 바쁘게 살아온 일반 친구들의 경우야 그래도 구실은 있다. 하지만 직업상 책을 많이 읽고 글을 쓰며 논문으로 자신의 업적을 차곡차곡 남겨왔을 친구들조차 편한 수단을 택하는 것을 보면 대세는 이미 카톡 쪽으로 기울었음을 짐작케 한다. 디지털시대의 특성을 반영한다면 이제 카톡 아니라 메타버스로 동창들 얼굴을 쉽게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머지않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우리 동기들은 다른 기수에 비해 유난히 교수가 많다. 학문에는 은퇴가 없다지만 이제 정년퇴직을 하고 그간 소원했던 교수들이 동창회 홈피에 올린 글을 대할 때에는 반백년 세월의 무심함을 새삼 확인해야만 했다. 평소 글을 많이 다뤄본 친구들의 글 솜씨는 역시 압축된 의사 전달력에 있어서 늘 압권이었다. 집요하다싶을 정도의 진지함으로 각진 평판을 받아오던 한 친구의 글이 현학적이지만 내겐 수준 높은 지적 감동을 불러왔기에 서로 댓글을 주고받으며 한동안 교류하기도 했다.

 

사실, 동기들에게 카톡은 대다수가 이용하는 소통수단은 아니다. 20명 안팎의 골프모임이 그룹을 이루다가 얼마간 흐른 후 그나마 이곳 재향 동기들의 소통 창구로 자리 잡았다. 자유로운 가입·탈퇴의 편리성에도 몇 친구만 얼굴이 바뀌었을 뿐 몇 년이 지나도 인원은 그대로였다. 여전히 두세 명의 친구들이 선거철을 맞아 열심히 담아 올린 쓰레기들로 좀 지저분해 있는 그대로였다.

 

내게 전화를 해온 그 친구와의 관계를 굳이 말하자면, 그저 먼 동창생 중 하나며 서로 공유할만한 취향도 없었고 예의 그 고약한 카톡족으로 내가 이미 낙인찍은 친구. 그래서 부정적인 인물 리스트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는 그런 정도의 관계. 한 마디로 내 상식과는 거리가 먼 친구인 셈이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가 누려온 사회적 책임과 경륜을 떠나 사려 깊고 분별력 있는 지식인의 본분을 팽개치고 누구나 인터넷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잡문이나 퍼 나르면서 은퇴생활을 보내는 한심한 인물. 나에게 그는 그런 측은한 분위기만 풍기는 친구였다. 그런 그가 드문 소통을 깨고 내게 연락을 해온 것이었다. 그것도 느닷없이.

 

동사무소는 십년 전부터 운영해오고 있는 우리들 아지트였다. 발족한지 몇 개월간은 친구들 얼굴도 볼 겸 가끔 찾곤 했다. 잘난 놈 못난 놈 없이 스스럼없는 모습으로 4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치기어린 그 시절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겉모습은 변한 듯했으나 오랜 세월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어 금방 누구인지 기억해내는 재미가 있었다. 그들도 나를 그렇게 알아봤다. 함께 나누던 막걸리 몇 잔에 홍안이 되었다. 한두 친구가 시작하는가 싶더니 금방 화투판과 카드패가 나뉘었고 그들은 밤늦게까지 거기에 몰두했다. 놀이패를 위한 끼리끼리의 자리가 동사무소모임의 주된 세력을 형성하는 것 같았다. 친구 몇이서 주춤거리다 돌아가서는 다시 찾지 않았다. 나도 그랬다. 동창회 운영도 놀이패 자리에서 결정되었다.

 

영어 회화 수업에는 끝날 시간 30여분 전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마침 쉬는 시간이었는지 친구가 복도에서 날 맞았다. 위아래를 훑어보는 듯싶더니 뭔가 할 말이 있는 표정으로 주춤거리다 단념하듯 교실로 날 잡아끌었다. 학생은 총 다섯 명. 엉거주춤하는 사이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근데, 뭐 입고 온 거여? 그거...중 옷 아녀?

······

 

처음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 대답을 못했고, 내가 입고 간 옷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후에도, 무어라 답변할 말을 찾지 못해 다시 머뭇거려야 했다. 질문의 내용이 너무 생뚱맞았기 때문이었다. ‘중 옷이라니.

 

, 이거...개량한복이야.

개량한복? 그거 뭐야, 국적불명의 옷 아냐? 그런 것을 옷이라고 입어? 아무렇지도 않아? 쯔쯔.

······

 

난 또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이제 혀를 끌끌 차면서 온갖 경멸에 가득 찬 제스처로 날 다그쳤다. 흥분하여 색색거리는 그의 숨소리가 조용한 교실에 가득 차올랐다. 그의 짧은 외침에 아웃사이더들의 숨소리도 바짝 긴장하였다.

 

나도 과거엔 자네와 같은 생각이었지. 하지만 요즘 날씨에 이렇게 입고 다니기엔 아주 안성맞춤이야. 너무 편해. 인도에 가서도 거의 활동복으로 입고 살았지.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말 안 해도 될 정도였으니까.

······

그렇지요. 개량한복이 요즘은 참 잘 나와요. 우선 편하고 다양해서 골라 입을 수 있는 것 같아요.

 

그가 무슨 말을 꺼내놓으려 국적불명이란 단어를 언급했는지 나는 재빨리 알아챘다. 그래서 내가 오히려 당황스러워졌다. 빠른 봉합이 필요했다. 함부로 내뱉어졌던 그의 어투까지도 추스를 수 있는 적절한 국면전환이 절실했다. 이럴 때 나의 오랜 침묵은 우리 둘 사이의 호흡을 가파르게 끌고 갈 것이다. 대기표를 들고 기다렸던 사람처럼 비로소 침묵을 깨고 말했다. 나의 빠른 답변이 못 마땅했던지 이번엔 그가 말을 잃었다. 보다 못한 한 분이 끼어들며 내 말에 동조를 보이면서 수습을 도왔다. 이쯤 되면, 소위 그와 나의 개량한복 에피소드는 이제 마무리에 이어 다음 수순으로 넘어가야 한다.

 

저렴하다보니까 아무렇게나 걸쳐 입는 거겠지. 그래서 편한 거 아냐?

 

용수철처럼 튀어나오는 말이었다. 십 대 고조부께서 벌떡 일어나 호통 치시는 줄 알았다. 그는 그렇게 혼잣말로 나무라며 빠르게 지나치려 하고 있었다. ‘중 옷국적불명까지는 넘어가려 했다. 하지만 이제는 명백한 거부감으로 말본새가 변하고 있었다. 그가 내뱉은 단어와 음절 사이에 온통 가시가 돋쳐 있었다. 예사로운 대화가 아니었다. 다분히 조롱하고자 하는 데 방점이 실려 있었다.

 

특정인의 복장 상태가 인구에 회자된 사건은 가끔 있어왔다. 그리고 그것은 파격을 몰고 왔던 것만큼이나 사건 전후 사회에 변곡점을 가져왔다. 18년 전 유시민 의원 노타이 백바지 차림 등원과 작년 류호정 의원 원피스 등원이 그거였다. 한 순간의 파격도 역사 속에서는 One of Them이 되는 법이다. 그러고 보니, 둘 다 국회의원이었다. 의원 신분이라는 진지함만을 지나치게 의식해서 발생했던 해프닝이지 않았던가. 우리 국회도 이제 그런 경직된 문화로부터 점차 자유로워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건 경우가 다르다. 초대에 응한 나의 배려와 출현에 대응하고 있는 그의 무식한 뜻밖의 태도에 역겨움이 올라왔다. 내가 개량한복 사는데 그가 일 원 한 푼 보태준 일이 있었던가. 게다가 그는 사사로운 모임에 차려 입고 나간 내 복장을 두고 지나치게 왈가왈부하고 있다. 노골적인 부정어를 동원해가면서까지 편향적인 가치관과 잣대를 들이대며 나의 자유로운 의사결정에 딴지를 놓고 있는 것이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았지만, 맞대응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차분해진 목소리로 애써 말했다. 내가, 수업에 계속 나오지는 못할 것 같네.

 

한국어가 갖는 중요한 특징 중 하나로, 다양한 용언이 문장 속 위치를 바꿔가며 미묘한 의미로 반전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저렴하다라는 형용사는 문장의 전체 맥락 속에서 매우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인 현상이다.

 

1) 처음부터 저렴한 가격구조를 목표로 했기 때문에 일반인들 모두 선호하는 상품이 되었다.

2) 중국도 이제는 그런 저렴한 가격구조만으로는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다.

 

예문 1)2)는 같은 저렴한 가격구조가 사용된 문장이다. 그러나 1)2)는 각각의 문장 속에서 긍적적’, ‘부정적맥락을 이끌어 내며 전혀 다른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2)저렴한싸구려와 같은 뜻으로 읽혀진 것이다. 내가 방금 들은 그의 말 속에서 받은 강렬한 메시지는 싸구려였다. 그는 내게 방금 싸구려니까 쉽게 걸쳐 입었겠지만, 그건 벗어버리는 게 어때? 라며 날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잘못 알았다. 그가 염두에 둔 정보는 이미 지난 낡은 세월에 입력해둔 허접한 가격표일 것이다. 빠르게 변하고 있는 주변의 디테일을 돌아보라고 외치고 싶었다.

 

건강을 잃고 삶의 벼랑 끝까지 몰렸다가 천재일우의 기회로 외국 가서 받은 수술 덕분에 사랑하는 가족을 다시 볼 수 있었다. 한 없이 겸손해지고 싶었다. 지금껏 공짜로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너무 고마웠다. 햇빛, 공기, 물을 비롯한 자연의 만물이 새삼스런 혜택처럼 다시 다가왔다.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돌멩이들조차. 하지만, 치열한 세상 속으로 나오니 예전의 스탠스를 습관적으로 밟던 날 발견했고 진하게 담았던 자연의 향기도 희석되듯 엷어져갔다. 누린 것만큼 베풀면서 왔다 간 흔적을 남길 수 있는 버킷리스트를 찾다가 해외 현지의 한국어교사를 지원했다. 은퇴한 후였다. 이것저것 잴 틈도 없이 제일 어렵다는 세종학당을 지원했다. 경험, 급여 등 타 기관보다 월등한 조건과 치열한 경쟁으로 압박감이 컸다. 이 나이에 뭐가 두려우랴, 스스로 다독이면서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시강-면접을 치른 결과, 뜻밖에도 놀라운 합격 통보, 기뻐할 틈도 없이 일사천리로 짜인 일정 때문에 연수, 비자 등 바쁘게 준비하다가 서둘러 비행기를 탔다. 인도향 비행기 속에서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울컥 했는가싶더니 펑펑 쏟아져 내렸다. 막상 비행기를 타고 보니, 이제야 가는구나, 하는 감격에 원 없이 울었다. 처음 몇 개월은 적응을 위해 바빴고 일상생활이 안정을 찾아가자, 신과 공작새의 나라-인도가 궁금해졌다. 모태신앙으로 크리스찬이었던 내가 삶의 굴곡 속에서 점점 무디어가던 신앙을 굳이 붙잡지 않고 살아온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이상의 세계에서 구원의 빛을 쬐어보고 싶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풀지 못 했던 내 안타까운 사유의 끝, 삶과 죽음의 실체, 그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가. 정말 되풀이하면서 윤회하는 걸까? 접어두었던 책갈피를 펼치듯, 힌두와 불교의 발상지, 13억 인도인의 정신세계를 향해 나는 저벅저벅 발걸음을 옮겼다.

 

<베다>는 기원 전 1,500년쯤 아리안 으로부터 전수되었다. 그것이 인도에 와 힌두와 불교의 근간을 이루었다. 힌두가 <베다>를 대중적으로 해석한 거라면 불교는 그것을 비판적 수용을 통해 발전한 것이었다. 신과 인간이 존재하는 점에서는 성경에서처럼 모든 종교가 그 궤를 같이 하고 있지만, <베다>는 성경에서와 달리 궁극적으로는 신과 인간을 구분하지 않고 있다. 성경에서는 신에 비해 단정적이며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베다>에서는 연속적 관계를 제시한다. 신이 곧 인간이라는 거다. 본질은 동일하다는 사상이어서 처음엔 뭐가 뭔지 개념 파악이 힘들었다. 하지만 파고들수록 명확해졌다. ()와 비아(非我)는 어떤 관계여야 하며 서로 가야 하는 궁극의 길은 어디인지, 비유와 상징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정곡을 찌르며 설파하는 <베다>의 설명은 마침내 우파니샤드라는 개념으로 명확해졌다. 범아일여(梵我一如). 우주적 자아와 개체적 자아가 동일한 실체라는 사상이다. 우파니샤드가 제시하는 게 바로 인간의 목표이다. 진정한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필연코 깊은 내면으로 침잠해 고독해야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차라투스트라의 동굴과도 같다. 세상에 나가서 자신을 비우는 차라투스트라가 스스로의 내면을 다시 채워나가는 공간. 물론 영원히 머물 수는 없다. 잔이 채워지면 다시 비워내야 한다. 마을을 향해 산길을 터벅터벅 내려가는 übermensch(위버멘쉬), 차라투스트라를 생각했다. 우파니샤드는 업에서 벗어나 윤회의 고리를 끊고 자유롭게 해탈하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 곧 목표임을 강조한다. <베다>는 친절하게도 범아일여에 이르는 비기(秘記)마저 공개한다. 욕망의 옷을 입고 끊임없이 등장하는 환영만 걷어낸다면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죽음 너머의 존재마저도 우파니샤드는 결코 비유적인 모호함으로 감추지 않는다. 나 자신의 노력으로 이룬 해탈의 세계에서는 슬픔, 고통은 물론 죽음에서조차 영원히 풀려난다.

 

영화를 같이 보고, 같은 책을 읽고 나서 해석을 서로 맞춰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사뭇 다른 해석으로 어리둥절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것은 각자가 이룬 삶에서의 체험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는 독서를 통한 간접 체험까지도 포함한다. 우리는 체험한 만큼의 시야 안에서 세상을 해석하며 살아간다. 그러니 자기가 경험한 시야의 경계는 볼 수가 없다. 넓은 시야를 체험한 사람은 더 넓게, 좁은 시야를 경험한 사람은 그만큼 더 좁게. 넓게 체험한 사람만이 좁은 시야를 경험한 이의 경계를 더듬더듬 알아차릴 수 있다. 그 반대는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시야의 경계만 인식할 수 있을 뿐 옳고 그른 사실은 누구도 식별할 수 없다. 오로지 자신만이 나중에 알게 될 뿐. 따라서 자기 뒤통수가 어떤지 전혀 볼 수 없다. 그렇지만 다들 답답함을 느끼지 않고 세상을 잘도 살아간다.

 

칼 융이 티벳 사자의 서를 해석하며 달아 놓은 유명한 문구가 있다. 책은 닫힌 책으로 시작해서 닫힌 책으로 남는다.개인의 선험적인 한계 때문에 책을 읽어도 그 문구를 해석할 수 없는 어려움을 위로하며 남긴 말인 듯싶다. 어떻게 하면 숨겨진 문구를 이해하며 마지막 책장을 덮을 수 있을까. 문구에 대한 선 이해, 선 체험, 배경지식 즉, 스키마의 폭 넓은 이해에 그 비결이 있는 건 아닐까. 책에 있는 문구는, 알고는 있지만 정리하지 못한 것을 언어화해준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이제부터 한 동창생의 우매한 언급과 무례한 지적과 허접한 체험과 무식한 자아로부터 해탈하고자 한다. 짧은 대화 몇 마디가 빌미가 된 오랜 기억 속 끄트머리쯤에서 비로소 나는 알아차렸다. 혀끝으로 던져진 그의 원초적 자아가 얼마나 한심한지를. 시계 제로의 공감능력을.

 

날벼락처럼 불쾌하게 엮였던 개량한복 설화로 극심한 심적 통증을 앓았다. 최근 나는 묵은 어깨 통증이 제때 적절한 치료 없이 40년 이상을 방치한 결과로 트라우마의 악연으로까지 연결된다는 실체적 체험을 한 바 있다. 자칫 이 설화가 그리 진행되지 않을까 우려하여 그와의 무의미한 설전을 반복하는 대신 글로 정리해보기로 한 것이다. 심각한 외상의 경우에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경증일 경우 치유적인 글쓰기가 도움이 된다고 한다. 상황을 벗어난 안전한 상태에서 차분한 마음으로 복기해내는 과정을 겪음으로써 심리적인 평화를 되찾을 것이다. 이 결정은 내가 겪은 트라우마 극복의 효과를 직접 체험하며 확신한 첫 번째 응용 사례가 될 것이다. 하드보일드 문체로 유명한 헤밍웨이 역시, 프랑스 전장에서 만난 첫애인 아그네스에게 배반당한 후 얻은 극심한 트라우마를 역작 무기여 잘 있거라를 집필하면서 스스로 치료했다지 않은가.

 

대한민국은 지금 정치의 계절, 바야흐로 차기 대통령 선거를 5개월 앞둔 이 시점에 여야를 막론하고 유력주자간의 치열한 공방이 방송을 통해 생생히 전달된다. 야당 한 유력주자가 무심코 던진 서툰 말이 무섭다. 5·1812·12로 역사적 죄인이 된 한 독재자에 대해 엇나간 평가를 한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의 고독이 그의 내면에도 머무르지 못했던 탓일까. 그의 언어는 아직도 특수부 검사에 머물러 있다. 정치 입문 4개월에 불과한 그는 아직도 먼 듯하다. 반대편의 또 다른 유력주자 역시 그가 놀던 지방행정의 궤도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 정치인이 되기 위한 준비만큼 정권교체도 멀리 보이는 슬픈 대한민국이다. 하지만 전환기 권력의 향방은 항상 럭비공처럼 종잡을 수 없는 법. 그런 그도 누구 말마따나 다시 별의 순간을 잡을 수 있을 것인지.

 

무심코 던진 말 한 마디가 타인에게는 트라우마가 되어 큰 상처로 남는다. 그 트라우마의 배아부터 제거하기 위해 시작한 글쓰기로 삶과 죽음의 골짜기에서 차라투스트라를 재회했고, 불안돈목(佛眼豚目)을 거론함으로써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상대에게 수준이하라는 낙인을 찍고 덤터기 조롱까지도 씌워줬다. 티벳 사자의 서에서 이미 겪었던 닫힌 책의 의미를 되뇌어도 봤다. 무식하고 우매한 동창생의 자아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눈 감으면 어김없이 나타나던 그의 잔상조차 끝내 지우고야 말겠다는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필사적이었던 내 노력과는 상관없이 그의 흔적은 여전히 내 안에 있는 것 같았다. 심호흡을 크게 해봐도 날숨 가득 비릿한 상처 냄새가 진동했다. 결국 트라우마 극복의 글쓰기 시도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헤밍웨이가 집필하면서 쏟아 부었던 무기여 잘 있거라에서처럼 치열한 내공이 없었거나, 상처의 깊이가 생각보다 큰 듯싶다. 전문가의 도움을 요하는 Debriefing까지 가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며 호들갑을 떠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무의식의 내면에 켜켜이 쌓였던 아픈 속내를 그런 식으로 드러내고 싶진 않기 때문이다. 하여, 난 지금처럼의 글쓰기 작업을 계속 할 것이다. 짧지 않은 세월을 인내해오며 지탱해온 내 자존의 오기가 그렇게 이끌었다. 젊은 시절 하얗게 밤을 새우다 깜빡 선잠 결에 느껴지곤 했던 엄마의 분내처럼, 힘든 습작으로 탈진해갈 새벽녘 불현 듯 다가온 안온한 희열로 새겨두면 될 일이다. 이제 그의 무식한 흔적은 털어내야 한다. 한 조각의 뉴런과 시냅스조차 남아나지 않도록 박박 문질러내야겠다. 내 안의 완벽한 그의 부재를 확인한 후 비로소 난 글쓰기를 계속할 것이다. 쓰고 또 쓸 것이다. 뒷산에 오르면 흐드러지게 피워대던 아카시아 내음이 날숨에 가득 밸 때까지. (20211020)

 

위 글 후반부쯤에 최근 20대 대통령 선거관련 언급이 있다. 그 선거가 끝나고 내가 언급한 인사가 20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어제 취임식을 가졌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축하하며 성공한 대통령이 되길 바라마지 않는다. 하지만 남의 과거를 캐는 직업만으로 평가를 받아 오늘에 이른 그가, 국민의 미래를 책임지는 막중한 일을 과연 어떻게 해낼지 자못 우려가 크다. 얼마 되지 않은 선거기간 동안에 그 우려의 단면이 언뜻 보였기 때문이다. 우려로 그치길 기대할 뿐. (2022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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