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생각들

한 여름 밤

늦깎이1 2022. 5. 10. 22:34

장마가 빨리도 왔다.

지구 온난화로 한반도의 기후가 아열대 징후를 보인 게 일이 년이 아니니 이젠 더위고 장마고 예전과 다를 것이다. 동남아 출장길에 만난 스콜로 구두가 흠뻑 젖었던 낭패스런 일이 우리에게조차 예사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오락가락한 일기불순으로 예정되었던 운동 계획이 잠정 보류 중, 그러나 찬찬이 예보를 뜯어보니 다행히 빗줄기는 피할 수 있겠다싶어 얼굴이라도 보자고 고집을 피워둔 터였다. 사실, 골프는 서울 생활에서는 일종의 사치였다. 비용도 터무니없었고 예약도 어려운데다가 동반자의 예기치 못한 문제로 팀 형성 자체가 늘 문제였다. 그러나 가장 큰 장애는 역시 시간이었다. 주말 새벽에 출발하여 잠들 무렵에 집에 들어와 다음 날 근무 걱정을 해야 했으니, 월급쟁이에게는 항상 무리였다. 나중에 지위가 올라간 만큼 자신의 운신을 위한 선택의 폭은 넓어졌지만 그 이면에는 어김없이 책임이란 녀석이 보란 듯이 히죽거리며 비웃음을 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여기 고향에서의 지금 골프는 그 때와는 비교가 될 수 없다. 그러니 일기불순 따위에 노심초사해야 할 우리가 아니질 않은가.

 

정말 장마는 딱 우리 운동만 피해갔다. 나보다 더 타수가 많았던 동반자의 마음을 위로하고 내일의 호쾌한 스윙을 기약하며 운동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다스리면서 같이 식사하고 헤어지는 게 골프의 묘미이다. 골프는 타수가 중요한 게 아니다. 동반자와의 따뜻한 교류를 위해 배려하고 위로하면서 룰과 에티켓을 지켜나가는 것이 이 운동의 요체이며 기본 정신이다. 그래서 골프를 심판이 없는 유일한 스포츠라고 규정한다. 가끔 친구들과 이것을 즐기다보면 기량을 앞세운 나머지 티격태격 다투는 모습도 발생되기도 하지만, 이것은 시간이 흐르고 나면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의 유치한 치기로 둔갑할 뿐이다. 서울 사는 친구들은 이런 기회를 많이 그리워 할 것이다.

 

미국 출장 계획을 현지에 통보하자 지점 담당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휴일 거래선과 운동 스케쥴을 잡아 놓을테니 운동화만 갖고 오라는 것이었다. 그 운동이 골프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않고 하얀 운동화를 하나 샀다. 막상 일이 끝나고 내일이 그날이 되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 운동의 정체가 궁금했다. 내가 내민 운동화를 본 그의 표정이 야릇하게 일그러졌다. 난 그날 그가 데려다 준 골프연습장에서 맨 손으로 두 바스켓을 쳤다. 손바닥의 껍질이 홀라당 나간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나의 골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연습을 열심히 해야 스윙 폼이 안정되고 공이 제대로 맞는다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난 지금까지 연습한 기억이 별로 없다. 처음 몇 개월의 똑딱 볼 기간도 견뎌내지 못하고 그대로 필드에 스스로 걸어 나갔다. 회사에서 나눠준 골프 룰과 에티켓이란 책만 두 번 읽었다. 그러니 내 나이의 절반에 달하는 구력을 보유하고도 백돌이의 턱을 아직도 오락가락한다. 그런 나의 골프 실력을 보고 친구들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달려든다. 동창 골프계에선 내가 그럭저럭 유명세를 타는 인사가 된 셈이다.

 

운동을 끝낸 만찬에서는 항상 시원한 막걸리가 최고다. 저녁에 집에 돌아가 독일전 월드컵 경기가 남아있어 기대감이 충만했다. 친구가 부추긴다. 먹본. 우리끼리 통하는 말이다. 막걸리가 참 잘도 넘어가는 날이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습도가 높아 땀이 비오듯 했다. 그러니 목이 말라 많이 마시게 된 셈이다. 독일전 축구 경기는 만족과 흥분 속에서 온 국민을 열광으로 몰아넣었다. 2002년 월드컵 4강의 영광만큼이나 값진 승부가 되었다. FIFA 랭킹 1위의 독일을 2:0으로 꺾는다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희망을 거는 일은 이렇게 값진 결과를 가져오는 법임을 우리 선수들이 세계 70억 인구에게 증명해주었다. 우리는 이 일을 결코 잊지 않고 앞으로 남은 많은 일들에 적용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집 막내가 아직도 귀가하지 않는다. 회사 동료들과 뒷풀이를 하겠지 했지만 2시가 넘어도 아직 감감 무소식이다. 아내가 드디어 전화를 하는 모양이다. 지 애비 닮아 차오르는 열정을 저렇게 어쩌지 못하고 식히려 애쓰는 중이리라. 그런데 이제는 슬슬 내가 걱정이 된다. 경기 시청 중에서부터 애 기다리느라 벌써 많이 마셨는데 못 일어나면 어쩌지? 내일 일찍 강진에 가기로 한 날인데.

 

자명종을 가동해서 늦지는 않았는데 평소처럼 벌떡 일어나지 못하고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느라 10분 정도 지체했다. 큰 결심을 한 것처럼 소리를 질러대고 겨우 일어나는 날 보고 아내가 걱정스런 눈으로 쳐다본다.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정말이었다. 우르르 꽝 거리며 쏟아 붓고 있었다. 적당히 둘러대고 가지 말까. 일순 거짓말이 떠오르는 날 도리질하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나를 기다리는 학생들이 강진에도 있다. 5명인데,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 등지에서 온 다문화 가족들이다. 매주 화요일 나는 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친다. 몇 가지 부족한 부분을 메꾸느라 진도가 계획보다 늦어 기말고사 끝나고 이번과 다음 주 목요일에도 수업을 하겠다고 공지해둔 터였다. 그런데 내가 거짓말을 하고 안 가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약속은 지켜야 한다.

 

진월동 버스 정류장까지 차를 몰고 가는 중에도 비는 오랜만에 원 없이 퍼붓고 있었다. 버스 시간까지 댈 수 없다면 난 차를 몰고 강진으로 직행할 요량으로 운전했다. 이 빗속을 뚫고 무사히 갈 수 있으려나. 일순 걱정이 앞섰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다행한 일이었다. 난 버스를 겨우 탔고 차는 날 아무 탈 없이 강진까지 데려다 주었다. 강진이 강진까지 가는 길은 이렇게 문제없이 길이 열려 있는 것이다. 학생들은 날 반겨주었고 난 그들에게 오늘 경어법수업을 했다. 밥을 진지로, 나이를 연세로, 말을 말씀으로, 아프다를 편찮으시다로 하는 특수어휘까지 진행하고 나니, 한 학생이 선생님,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한다. 그래서 난, 한 수 더 떴다. ‘선생님 춘추는 몰라도 돼요했더니 눈이 휘둥그러진다. 그래서 우리는 한바탕 크게 웃었다.

 

나는 장마가 시작되는 이 여름 초입, 한 여름 밤에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면서 나름대로 재미를 유지하려 무진 애를 쓴다. 문득, 며칠 전 학교 화장실에 붙여진 글이 생각나 여기에 옮겨본다.

 

스토아학파는 참고, 에피쿠로스학파는 추구하고, 불교 힌두인은 미몽에 잠겨있고, 모슬렘은 굴종하며, 오직 기독교인만 유쾌하다.

 

현역에서 물러난 난, 보다 느긋한 일이 성에는 차지 않지만 전성기의 절반도 안 되는 에너지를 쓰면서 즐거워하고 있다. 아마도 다른 친구들의 사정도 비슷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런 시대를 살고 있다.

 

여유 있는 지도층.

참으로 듣고 싶은 말이다. 그런데 우리의 친구가 나에게 들려준 이 말. 난 이 말을 듣고 전혀 즐겁지 않다. 공정하지 않은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내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친구는 내게 어울리지 않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친구는 지금도 현역이다. 그의 석탄가스화 사업이 탄력을 받기 시작한 것이 최근의 일이어서 설마 문제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지만. 1억 위안의 자본금까지 합세한 상황이라 들었고 친구의 재능과 추진력이라면 성공의 길로 들어선 모양새임이 틀림없다. 아무튼 조만간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친구가 국내 기업의 동향을 비관조로 표현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좀 불길하다. 주말을 건너 뛰어 홈피에 들어 왔다가 친구의 이런 붙임 글을 대하고, 선뜻 전화로조차 친구의 사정을 확인할 엄두도 낼 수 없다. 가만히 지켜볼밖에. (2018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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