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생각들

마스크

늦깎이1 2022. 5. 10. 09:50

미세먼지가 기승이다. 이 어휘는 이제 일반 국민이면 누구나 쉽게 이해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어린 시절, 송홧가루가 날리는 철이 되면 하얀 보자기를 들고 나가 인근 산야를 쏘다니며 받아오던 노란 꽃가루에 대한 기억이 새롭다. 그 시절의 공기는 언제나 맑고 상쾌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송홧가루와 더불어 산업화로 인한 먼지와 중국 황사를 범벅으로 느끼면서 비로소 우리는 공해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새 어른이 되어, 주차했던 차 위에 수북이 쌓여있던 누렇고 지저분한 흙먼지를 보고 송홧가루에 대한 추억에 빠져들 틈도 없이 날로 더해가는 우중충한 하늘을 걱정하면서 먼 미래에 닥쳐올 막연한 재앙 정도로 미뤄두고서 긴 시간 잊고 살아온 터였다. 그러던 세월도 한참 더 흘렀다. 언제부터였던가. 어느 날인지 모르게 기상 예보에 등장하기 시작한 미세먼지가 점점 더 자주 언급되는가싶더니 드디어 이 미세먼지의 정체에 대해 궁금하다 못해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일이 생겼다.

 

뉴스에서 미세먼지주의보를 발령하는 날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지자체에서 보내는 재난 경고 문자까지 몇 번 떴다. 미세먼지의 오염 원인이 주변의 환경에 대한 피해는 물론 이를 날마다 들이 마시고 살아야 하는 개개인의 건강에 치명적인 재앙이 될 수 있다는 경고였다.

 

미세먼지주의보는 10여 일이 넘어서까지 계속되었다. 날마다 계속되는 미세먼지주의보는 지금까지 막연하게 생각해왔던 너와 나의 인식을 전환시키는데 더없는 전환점을 만들어 주었다. 더 이상 국가가 국민들의 건강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는 것 같았다. 주의보가 넘어서 경보를 날리고 더 심해지면 이제는 이곳을 떠나라 할 것인가.

 

공기청정기와 미세먼지용 마스크의 매출이 전년 대비 2배와 3배로 급상승하고 있다는 뉴스가 계속된다. 미세먼지주의보에 자극을 받은 개개인의 인내력이 바닥을 치고 자구책에 따른 구매활동이 시작되었다는 방송 해석이다. 북핵 협상이 결렬된 이래 핵 위협이 재개되려나했더니, 인류의 재앙은 이렇게 엉뚱한 곳으로부터 봇물 터지듯 다가오려는가 보다. 인류의 미래를 그린 SF 영화에 으레 등장하곤 했던 스틸 컷들. 우중충한 잿빛 하늘, 황량한 들판에 나뒹구는 스산한 바람, 덩어리를 이루어 굴러다니는 먼지와 고철 부스러기들, 안전한 곳을 찾아 지하 깊숙이 요새를 만들고 그들이 탄생시켰던 괴물들과 한 판 승부를 벌여야만 했던 인류의 미래 모습.

 

가전제품의 사명은, 게으른 인류의 편의성과 복지를 위해 탄생되어 많은 사랑을 받고 발전해가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래왔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다를 수 있다. 여태 무상으로 제공받아왔던 물과 공기. 우리는 이제 그것을 가공하여 써야만 한다. 정수기가 그렇고 공기 청정기가 그렇다. 우리가 만들어 사용하다 무심코 버린 플라스틱 조각을 먹은 어류들이 어시장 좌판에서 발견되고 있다지 않은가. 우리의 머리 위에 비나 눈을 머금은 하늘이며, 봄이 되어 지천으로 피어날 꽃과 그들이 뿜어내는 향기, 그리고 딛고 서있는 이 멋진 대지가 어느 날 우리를 공격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미세먼지주의보가 10여 일을 넘어가며 암울한 하늘이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미루던 공기 청정기 두 대를 집 안에 들였다. 큰 집일 경우, 큰 거 한 대보다는 작은 거 두 대가 대류 현상의 영향으로 훨씬 효과가 좋다는 전문가의 자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 밖 생활을 위해 미세먼지용 마스크 한 박스를 사들였다. 늘 마셔오던 공기에 대한 믿음이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는 미세먼지주의보로 인해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이제는 스스로 자구책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나는 오늘 집을 나서며 예고된 미세먼지수치를 확인하고 버릇처럼 새 마스크를 얼굴에 둘러써야만 한다. 4중 필터로 만들어져 안전하다고는 하지만 평소에 안 하던 마스크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정도의 불편은 얼마든지 감수해야만 한다. 영화에서처럼 방독면을 써야만 살 수 있는 미래가 필연적이라면 우리가 과연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이어야 할까, 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으나 그런 나를 책망하듯 머리를 좌우로 강하게 흔들며 황급히 차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오늘의 일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사실 인류가 마스크를 사용한 기원은 기록을 찾아볼 필요도 없이 오래 전부터였다. 원시시대부터 종교적, 주술적 의식과 이를 중심으로 펼쳐졌던 제전의 성격이 강한 행사에 마스크를 썼다. 지금 우리가 쓰고 다니는 보건 의료용의 이 간단한 마스크는 역사적으로 볼 때 원래 목적에서 벗어나 지극히 개인적인 용도로만 사용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반해 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나 콩고 등에서는 성인식을 위해 필요에 따라 젊은이에게 혹은 부족의 장로들에게 마스크를 씌워 초월적 존재 앞에 우뚝 선 운명적 암시의 섬뜩한 행사를 지금도 지속해오고 있다. 부족 단위의 공적인 행사에 엄숙히 사용되고 있다는 얘기다. 또한 태평양 연안에서 발견되는 토템 신앙과 아시아, 시베리아, 에스키모, 북아메리카 인디언 등지의 샤머니즘은 주술사의 형상이나 지역을 상징하는 자연물의 모습을 마스크로 일체화하여 자연 속에 깃들어 있는 정령을 통해 악귀를 퇴치하거나 병을 고치는 엄숙한 의식을 오랜 기간에 걸쳐 허용하여 왔다. 그 밖의 다른 기록에 의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사자의 내세를 위해 그로테스크하거나 화려하게 장식한 황금 마스크를 제작하여 두개골 위에 덮어 씌웠고 두개골 자체를 장식하여 벽에 걸어두고 우상화하기도 했다.

 

얼굴을 가리는 마스크로 출발은 했지만 종교적인 이유로 코란에서부터 유래한 이슬람의 히잡은 좀 특별한 경우이다. 얼굴만 내어 놓는 두건의 의미로 불리며 아랍지역 전체 여성이 두른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눈을 포함해 전신을 가린 부르카를 입는다. 눈 부위는 망사로 처리하며 손에는 장갑까지 끼도록 하고 있다. 이를 인도와 파키스탄에서는 망사 없이 비슷하게 착용하며 니캅으로 부른다. ‘히잡과 구별하여 이란에서는 차도르라 불리는 의복을 여성이 입는데 이는 히잡즉 두건을 두르고 얼굴을 제외한 전신을 가린다. 이슬람 여성의 히잡착용을 여성에 대한 속박이라든지 혹은 자유를 박탈하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이슬람적 가치에 근거하여 여성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상징적인 존재를 이룸으로써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슬람권에서 시행되고 있다.

 

원시시대의 종교의식이나 민속의식에서 유래한 마스크는, 유럽으로 건너와서는 왕족을 위한 여러 가지 이름의 매우 우아한 궁정연희 즉 가면극으로 발전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에서는 메디치의 후원으로 노래와 춤, 무대장치나 설비를 강조하는 막간극(intermezzo)이 유명했고, 프랑스로 건너가서는 궁정 발레(ballet de cour)와 호화로운 가장행렬이 되었다. 그 후 16세기에 대륙의 가면극이 영국으로 가서 스튜어트왕조시대에 꽃을 피웠고 이 가면극은 호화롭고 거대한 무대장치와 더불어 오늘날의 뮤지컬과 오페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스크로부터 출발한 원시의식이 음악과 연극, 그리고 무대장치를 더해 성대해지면서 점차로 마스크는 퇴조하고 화려하고 웅장한 무대예술로 변화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난 미세먼지에 대한 이름 모를 공포가 몰고 온 마스크 상용화 시대의 이 짧은 상념 속에서 하이든을 불러 들여야 했다. 그가 작곡했던 <천지창조>의 의미와 음률을 곱씹어봄으로써 아담과 이브를 세상에 내놓고 흡족해 하셨던 그분께 어떤 형식으로든 속죄하고 싶었다.

 

하이든은 활동하던 에서 당시 산업혁명으로 자본주의의 꽃을 피우고 있던 영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웨스터민스터 사원에서 헨델사후 기념으로 공연되었던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아 으로 귀환 후 그 음악적 규모에 대응한 <천지창조>의 작곡을 시작했다. 당시 그는 1,000명 이상의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만들어 내는 웅장한 규모의 음악적 분위기와 할렐루야의 성대한 절정에 눈물을 흘리면서 음악공부의 원점으로 돌아온 것 같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당시 받았던 그 충격을 그대로 <천지창조>의 창작에 자극과 영감으로 쏟아 부었다. 하이든<메시아>할렐루야에서 받았던 감동을 훨씬 뛰어넘는 아멘으로 <천지창조>의 방점을 찍었다.

 

우리는 이제 <천지창조>를 통해서나마 절대자의 존재를 인식하고 의존하며 옷매무새라도 추스르는 반성과 다짐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조상들로부터 아름답고 안전한 자연을 물려받았듯이 우리 후손에게도 그것을 그렇게 물려주어야만 할 책임과 의무가 있을 것이다.

 

최근 반 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대통령 직속의 미세먼지 해결을 위한 범국가적 기구위원장을 기꺼이 수락했다고 하니, 아무쪼록 가까운 시일 내에 원만한 대책이 수립되어 향후 지구 환경 문제를 풀어 나가는 멋진 선례를 이루면서 안전하고 평화로운 인류 행복의 초석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20190321)

 

사실 이 글은 코로나 팬데믹이 전 세계를 괴롭히기 전 갑자기 등장하기 시작한 미세먼지 때문에 당시의 불편했던 생각들을 정리한 글이다. 그런데 그 후 코로나가 창궐했고 과거를 다시 소환한 흑사병의 공포를 우리는 또 체험해야 했다. 마스크는 지금 세계인의 필수품이 되었다. 격세지감이다. 아직은 엔데믹을 이야기할만한 상황은 아니지만 성급하게도 우리는 그것을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오더라도 우리는 또 다른 공포의 시작이 올 것임을 미리 알고 있다. 고글을 뒤집어 써야하는 날이 오지는 말아야겠다. (2022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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