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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산성

늦깎이1 2023. 3. 6. 09:14

담양 금성산성은 보이는 것처럼 난공불락의 요새다. 주봉인 600m의 금성산을 중심으로 고만고만한 다른 4개의 능선을 따라 7km에 달하는 외성으로 축성되었고, 그 안에 또 800m 규모의 내성까지 겹으로 구축된 입보산성이다. 분지처럼 움푹 꺼져 들어앉은 지대를 중심으로 조성한 내성에는 사철 마르지 않는 샘이 7군데나 있어 식량만 확보된다면 수천 명이 장기간 생활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실제로 몽골군이 쳐들어 왔을 때 이곳 주민들은 금성산성에 들어가 오랫동안 항전을 이어갈 수 있었다.//산기슭에서 100m 정도 오르니 평일이라 한적해진 주차장에 차를 두고 드디어 산행을 시작했다. 잘 다듬어진 맹종죽 숲을 오른쪽으로 끼고 100m 정도를 더 오르니 꽤 넓은 평지가 나왔다. 얼핏 우거진 숲 사이로 난 오솔길의 오르막이 웬걸 장난이 아니다. 땀깨나 흘리지 않으면 안 되는 길? 정말이었다. 그리 높은 산이 아님에도 좁고 가파른 산길만 끊임없이 이어진다. 50m정도 힘들여 오르면 이젠 어김없이 나무뿌리와 바위가 제멋대로 엉겨 붙은 암벽이 나타났다. 드디어 산성의 바깥 성문인 보국문에 다다르니, 왜 이 성을 입보산성이라 부르는지 이해가 갔다. 돌출된 암벽 위 그대로 촘촘히 바위를 얹어 축성한 성문이 나오고 그 위는 문루를 지어 양쪽 연결로를 가파른 성벽으로 둘러싸니 천혜의 요새 그대로다.

 

최초의 축성 시기가 삼국시대였을 거라는 막연한 기록처럼 수천 년에 걸쳐 되풀이되어 온 싸움터의 현장에 막상 다다르고 보니, 당시의 치열했던 공방의 함성들이 한 순간 쏴~하니 귓가에 맴돌다 사라지는 환청을 느껴본다. 엄숙한 마음으로나마 첫 관문인 보국문을 그렇게 통과했음에도 어쩐지 그대로 지나치기엔 아쉬움이 크다. 다시 뒤를 돌아본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확 트인 풍경은 역광을 받아 어두운 문루와 함께 멀리 비치는 금성면의 너른 평야를 실루엣처럼 배경으로 비추고 있다. 내성으로 향하는 통로의 중간쯤에서 다시 드론을 띄우니 양쪽의 가파른 성벽과 울창한 잡목 사이로 어둡게 비치는 계곡들의 아찔한 풍광들을 빠짐없이 비추며 여기가 얼마나 안성맞춤인 천혜의 입보산성인지를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녹음 짙은 한 여름이었더라면 그 푸르름에 눈이 시려버렸을 것이다. 오랜만의 고된 산행에 지친 등산객들의 젖은 땀을 한 줄금 불어오는 바람 소리와 함께 시원하게 날려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목마르고 허기졌던 서로를 다독이느라 땀에 젖은 배낭을 풀어 제치고 무성히 우거진 느티나무 그늘 밑에들 모여들었을 것이다. 안에서 다시 내다보는 바깥 풍경에 잠시 취해 있는 사이 드론은 문루의 팔작지붕과 움푹 팬 통로를 무슨 참호마냥으로 비추고 있다. 지상의 풍물에 익숙한 우리에게 선사하는 드론 촬영의 선물인 된 셈이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역광의 어두움도 극복하고 명암이 선명한 밝은 모습을 비추어주니 그 또한 새롭다. 내친 김에 주변의 풍광을 다시 한 번 더 빙 돌아가며 멀리 보이는 평야며 산세, 그리고 3월 초입의 억센 바람까지도 담았다.//멀리서 다음 행선지인 내성의 문루가 보인다.

 

드디어 산성의 속살을 더듬어 볼 순서가 되었다. 내성인 충용문이다. 성벽은 산성 주변의 자연 암반에서 떼어낸 수성암 계통의 석재를 판자 모양으로 거칠게 다듬어 경사가 가파른 사면부와 능선 정상부는 외벽만 성돌로 쌓는 편축식으로 올렸다. 성문 부근은 내 · 외벽을 모두 성돌로 쌓는 협축식으로 올려 지형조건에 따라 자연스런 축성법을 적용했다. 암벽이 있을 경우에는 성돌과 자연스럽게 접합되도록 처리했고 그 위 부분에는 성돌을 깔지 않았다. 성벽이 지나가는 구간의 높낮이 편차가 큰 점을 고려하여 경사면에 따라 잔돌로 고정시켜 가며 수평쌓기를 하였다. 일반적으로 성벽 밑 부분에서 상단까지는 높이가 일정하지만, 금성산성은 성벽 상단을 계단식으로 마무리하여 높이가 일정하지 않은 점이 특징이다. 고려시대 이후의 성벽은 지대석을 놓고 아래쪽에 큰 돌, 위로 올라갈수록 작은 석재로 쌓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지만 금성산성은 지대석 위에 일정한 크기의 성돌만으로 쌓았다. 험준한 지형에 맞추어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막고, 안정적인 구조를 유지할 수 있도록 적절한 축성법을 적용하였기 때문이다. 금성산성 축성의 특이함 덕분에 다양한 자료를 뒤적이다보니 이런 정도의 안목만으로도 꽤 유식해진 기분이다. 외성의 보국문과 똑 같이 좁은 성문 위로 팔작지붕을 펼친 문루가 버티고 있다. 3m정도의 성벽에 둘러싸인 채 성문까지 걸어가야 하는 좁고 긴 통로에 위압감마저 감돈다. 한참을 망설이며 더듬거리다 드디어 성문으로 향했다. 혹여 몸이 닿을까 반쯤 열린 성문 사이를 통과하는데도 저절로 조바심이 인다. 동학농민군과의 전투에 임했던 당시의 왜군들도 그런 마음이었을까.//어두운 문루 밑 통로를 빠져 나오니 호남창의회맹소입간판이 당시의 울분을 터뜨리듯 우뚝 서서 앞을 막아선다. 광주의 기삼연이 다시 을미의병의 실패를 거울삼아 호남의병 연합부대를 결성해 담양까지 왔다가 방어하기 좋은 이곳에 들어와 전열을 다듬고 투쟁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일본군에게 잡혀 광주 서천교 백사장에서 총살당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계속 이어져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기 전까지 호남 지역은 일제에 맞서 가장 강렬하게 저항한 지역이 되었다.//성문 내 광장이었던 듯 꽤 넓은 평지 사이로 본격적인 내성 내부로 들어가는 오솔길이 보인다. 1895년 고종 때 제작된 金城鎭圖를 보면 동헌, 숭대장천, 장교성, 화약고, 내아, 식량창고 등 관청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물론 민가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 전봉준이 식량 확보를 위해 순창에 내려갔지만 김경천의 밀고로 잡히고 난 후, 대대적인 일본군의 공세에 맥없이 무너진 이곳 금성산성의 모든 역사적 증거가 전부 불에 타거나 파괴되어버린 때문이었다. , 인걸은 간 데 없구나.//오른 쪽으로 다시 내성의 성벽과 충용문의 문루가 나오고//고도를 높이면 멀리 추월산과 담양호 그리고 금성면의 너른 평야가 아스라이 펼쳐진다.//더 높이니 지나왔던 보국문으로 연결된 성로가 멋진 조망을 보인다. 금성산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광이라 할 수 있다. 이 영상은 지난 2009년 드라마 선덕여왕의 촬영지로도 이미 명성을 떨친 바 있다.

 

민족의 오랜 역사만큼 금성산성은 시대적 굴곡이 있을 때마다 영욕을 함께 했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을 끝으로 파괴되고 소실되는 불운을 겪었다.

 

부패한 집권층 타도, 민씨 정권 축출을 목적으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은 항일 의병전쟁, 독립운동의 성격으로 변모하였다. 조선 정부가 일본군을 불러들인 결과였다. 각지에서 많은 접주들이 항거하여 봉기하였으나 그 규모는 소수였다. 전봉준 부대만이 대규모로써 호남의 5천명을 이끌고 일본군 수만 명을 상대로 항전을 벌였다. 우금치 전투에서 엄청난 전력의 손실을 입고 대패한 전봉준은 이곳 금성산성으로 우선 대피했다. 식량만 조달하면 재기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가까운 순창의 옛 수하 김경천과 만났다. 그러나 보상금에 눈이 어두웠던 김경천의 밀고를 받고 출동한 퇴교 일당들에게 붙잡혀 압송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김개남조차 다른 이의 밀고로 태인에서 붙잡혔다. 지도자들을 잃은 동학농민혁명은 구심점도 탈출구도 없이 지리멸렬해졌다. 금성산성에 남아있던 농민군들은 체포되거나 도주했고 성벽은 무참히 파괴되었으며 온갖 건물과 은거지가 완전히 소실되는 참극을 당했다. 지금의 성벽과 성문, 문루 등은 1995년부터 2000년 초까지 꾸준한 고증과정을 거쳐 엄청난 예산을 투입해 복원한 결과이다. 해방 후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잊히지 않고 그나마 복원을 하게 된 것도 민주화과정을 거쳐 탄생한 정권 덕분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있지만 여기서는 더 이상의 언급이 불편하다. 배신했던 김경천은 군수는커녕 아전 자리도 얻지 못하고 백성들로부터 전봉준을 밀고한 역적이라고 해서 손가락질을 받았다. 결국 그는 떠돌아다니며 얻어먹다가 어느 노상에서 굶어 죽었다고 전해진다. 역사는 필연이다. (2023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