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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도라도의 낙조

늦깎이1 2023. 2. 8. 00:52

엘도라도 리조트에 왔다. 언어치료심리센터를 개설해 갑자기 바빠진 큰 애가 설날 이틀을 남겨두고 연락을 해왔다. 이번은 언젠가 가봤던 증도에서 설 휴가를 보내며 새해를 맞고 싶다는 거였다. 우리도 찬성을 했고 그래서 단촐하지만 큰 애 가족과 막내 그리고 우리 부부까지 서울에서, 청주에서 그리고 광주에서 승용차 두 대로 나눠 타 귀성행렬의 긴 꼬리를 물며 이곳 엘도라도에 도착했다. 다섯 시를 넘겨 체크인을 했던 관계로 일몰까지는 시간에 여유가 없었다. 급히 드론을 챙겨 골든 비치의 마지막 태양을 맞았다.

 

갯내음을 실은 찬바람이 황혼녘의 해변을 황금빛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마침 밀물 시간이었던지 끊임없이 들이미는 조수의 잔잔한 물결이 역광을 받아 물고기 비늘처럼 음영을 남기며 반짝거렸다. 일몰은 아직 좀 남아있었다. 태양은 멀리 보이는 섬들 위에 자신의 몸보다 2배 정도의 고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이제 곧 그 간격은 좁아질 터였다. 아니 그렇게 짐작했다. 기다렸으나 내 심중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그 순간의 시간은 예상보다 길게 지속되었다. 줌인을 풀고 고도를 낮춰봤더니 멀리 비치고 있는 태양이 앞에 있는 섬 능선을 따라 내려가며 보기 좋은 낙조의 형태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래 우선은 이거다. 이 정도의 속도가 유지된다면 리조트의 풍광을 한 바퀴 여유롭게 돌아보며 임인년 음력 마지막 낙조를 마음 편히 감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정도 고도를 낮추고 섬 끝에 점처럼 남은 황혼녘의 태양을 올려놓으니 꽤 그럴싸한 낙조의 정형적인 모습이 연출되었다.

 

15년 전쯤이었던가, 탤런트 김미숙 부부와 우리 가족이 이곳에서 만나 하룻밤 같이 머물며 휴가를 보낸 적이 있었다. 큰 애가 대학 새내기시절이었으니 오래 전 이야기다. 당시 난 전자부품연구원 초대 광주지역본부장으로 국비 500억을 예산지원 받아 센터 건축, 장비도입 및 연구원 채용 등으로 건강을 해쳐가며 무리를 하고 있을 때였다. 김미숙 씨와 아내와의 인연으로 그리된 만남이었는데, 잠깐의 휴가가 내게 도움이 될 거란 아내의 충고를 난 받아들였다. 큰 애는 공기업 다니는 남편과 결혼 후, 자신이 일하던 언어치료사를 때려치우고 장롱면허생활을 오래 지키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갑자기 언어치료심리센터를 개설했다. 그런데 그게 쉴 틈 없이 일해야 하는 즐거운 일터가 되어버렸다. 그동안 사위는 어린 손녀 보살피느라 1년간 육아휴직을 했다. 코로나로 마스크가 생활화된 나머지, 부모와의 언어 소통에 문제를 일으킨 아동들 때문에 빚어진 사회현상이었다. 사위도 자식이니, 그의 편의나 배려가 부모에 비길 바 없이 고맙고 사랑스럽지만, 딸이 스스로 벌어 이런 기회를 만들어주니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 된 것이다.

 

신안은 이곳 증도를 비롯해 임자도, 압해도, 자은도 등 1004섬들로 이루어진 서해안의 낙원이다. 7개의 중심 섬들은 11km의 연륙교로, 작은 섬들은 1.5km의 목교로 연결함으로써 갯벌과 해안 생태계 자체가 훌륭한 관광자원이 되었다. 게다가 전국에서 생산되는 천일염의 70%가 여기서 나온다. 좌로 빙 둘러보니 멀리서 가까이서 무수한 섬들의 파노라마가 소리 없이 전개된다. 그때는 증도 앞까지 승용차로 왔다 차에 탄 채로 배에 실려 긴 시간 갈매기 떼와 함께 증도로 건너왔었지만, 지금은 증도대교에 진입했다 싶은데 얼마 안 가 바로 섬에 닿았다. 시간은 많이 절약되었으나 배 위에서 느껴보는 바다 여행의 운치가 없어 뭔가 특별한 그게 없었다. 그게 뭘까? 이럴 때 적절한 표현이 있다. 거시기다. 그래 좀 거시기 했다. 다양한 형태의 엘도라도 리조트 빌라들이 해변과 섬 주위에 적절한 거리를 두고 오션 뷰의 멋진 조망권을 확보한 채 벌써 20여년의 역사를 만들며 자리하고 있다.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해변에 모여 있어 뭘 하나, 하고 줌인해보니 물수제비 놀이를 하고 있었다. 글쎄, 다들 흥에 겨워 바다를 향해 힘껏 돌을 던져보지만 누구 하나 길게 물장구에 성공하질 않는다. 그들은 지금 물때를 잘못 맞춘듯했다. 썰물이라면 모를까. 그래도 그들은 지금 너무 즐겁다.

 

, 이제는 시간이 된듯하다. 드론의 기수를 더 왼쪽으로 돌려 수평선에 눈높이를 맞추어 나가자, 아뿔싸, 멀리서 눈에 들어오는 붉은 빛의 희미한 노을만 흔적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줌인을 하며 더 가까운 흔적을 찾아 초점을 맞추자 확대된 황혼녘의 하늘이 나타났다. 너무 지체한 것은 아닌가, 일순 후회스러운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낙담은 금물. 여기가 1004의 섬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렇지 섬들이 아마 겹쳐 있을 거야. 고도를 높여 나가자, 감추었던 황혼의 환상적인 모습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드론은 더 높이 날았고 시야는 훨씬 확대되었다. 한 무더기의 섬들을 재끼고 더 멀리 있는 또 한 그룹의 섬 맥이 드러나고 이제 바로 이어 그 다음 섬들이 거뭇하게 나타났다. 고도를 더 높이니 그것들 뒤에 희미한 산맥처럼 섬의 마지막 배열이 그림자처럼 눈에 들어왔다. 결국 네 겹의 섬들이 태양을 둘러싸고 애지중지해가며 임인년 마지막 일몰 행사를 엄숙하고 고요하게 치러내고 있는 중이었다. 장엄한 노을이었다. 지난 번 친구들과 진도 솔비치에서 날씨 때문에 놓쳤던 일몰로 못내 서운했던 아쉬운 날도 이제는 저 낙조와 함께 훌훌 떨쳐 내버렸다. 멀리서 대여섯 기의 풍력발전기 블레이드가 불어오는 바람을 맞아 서서히 돌아가는 모습이 어두워지고 있는 하늘을 배경으로 선명하게 나타났다. 이제 계묘년이 시작될 것이다. (2023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