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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비결

아내가 己亥年 올해 벽두에 토정비결을 보고 나서 신이 났다. 새해가 되면 남들처럼 가끔 그걸 봤다는 후일담을 흘려들은 적은 있으나 올해처럼 저렇게 몇 번이나 얘기하며 호들갑을 떤 적은 없었다. 해년마다 빠지지 않았던 삼재와 액땜이 자취를 감추고, 무엇보다도 내가 끊임없는 외조를 아끼지 않을 것이라는 거다. 아내가 저리 좋아하니 덩달아 기쁜 내색을 감추지는 않았으나, 외조는 나의 능력과 열성이 필수적인 사항인지라. 土亭秘訣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기인 李之菡이 저자로 알려져 왔지만 최근 학자들은, 민간에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주역서에 예전부터 친숙했던 그의 이름을 붙였을 거라는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당대 백성들의 궁핍한 삶 속에서 실낱같은 희망의 끈을 이으려했던 유일한 주역의 대가이자 기인이었..

카테고리 없음 2022.05.10

친구니까

Ⅰ 운동 30년에 하루 전 펑크는 처음입니다. 설사, 배탈에 정치적으로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운동 후 저녁자리에는 갑니다. 손해보상도 하겠습니다. 약속된 운동 시작 3시간 전, 한 달에 한 번씩 하는 친구들과의 운동이 부득이한 문제로 불가하다는 한 친구의 소식이 카톡으로 들어왔다. 시간상으로 보아 최대한 참석하려 했다가 도저히 여의치 않아 마지막으로 통보한 것으로 짐작되는 내용이다. 그런데, '정치적'으로는 뭐고 또 무슨 '손해보상?'. 기업을 운영하는 이 친구가 무슨 정치? 선거 나오려나? 몇 가지 의문이 연이었지만, 저녁에 보려니 생각하고 카톡에 답신을 보냈다. 손해는 배상하고 손실은 보상해야 합니다. 적법이냐 위법이냐가 관건이네. 정색하기는 그렇고 그렇다고 모른 채로는 거시기하고 해서 짧게 응답을..

카테고리 없음 2022.05.10

운천저수지

올 장마는 이렇게 지나가려나? 며칠 남부 지방에 피해는 몰고 왔지만 전국적으로는 특유의 줄기찬 비 소식 없이 습도만 높은 날씨의 연속. 하지만, 종일 제습기만 가동하며 갇혀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긋지긋한 장마철 끈적거림에도 이골이 난 터였다. 반짝 해가 비치자, 오래 기다렸었다는 양, 서둘러 운동화 끈을 조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자기암시가 될 수 있도록 속으로도 여러 번 되뇌었다. 간절하게. 세종학당 계약기간도 끝났고, 확실한 은퇴생활에 돌입하면서 혼자만의 다짐을 한 게 있다. 간단하다. 십 일간 세 권 이상은 책을 읽는다. 매일 만 보 이상 걷기를 반드시 실행한다. 책 빌려보는 일이야 어려울 것 없지만 계절과 기상 상태에 따라 기복이 많은 걷기는 너릿재 숲길과 운천저수지+518 기념공원으로..

카테고리 없음 2022.05.10

우리의 세렌디피티를 위하여

19세기 말 스코틀랜드의 한적한 농촌 어느 날, 소년 하나가 조그만 연못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농사일에 열중이던 한 농부가 이를 발견하고 재빨리 구해냈다. 뒤늦게 달려 온 소년의 아버지가 정중한 태도를 견지하지 못하고 연신 허리를 굽혀 감사를 표시했다. 그는 당시 영국 왕실로부터 공작 작위를 갓 부여받은 최고 귀족 신분이었다.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도 답례를 표시했으나 한사코 거절하는 농부에게, 그렇다면 제가 아드님에게 대신 답례를 하겠습니다, 라며 마지못해 마무리를 짓고 런던으로 돌아갔다. 결국 그 귀족은 약속대로, 집안 형편이 어려운 농부의 아들을 런던의 한 의과대학에 진학시켜 의사의 길을 걷도록 했다. 그는 1차 세계대전으로 상처를 입은 수많은 병사들이 손을 쓸 틈도 없이 상처 그 자체로 죽..

카테고리 없음 2022.05.10

楊 林 散 策

양림동. 어린 시절을 금동에서 보냈던 나에게 양림동은 그저 이웃 마을에 불과했다. 금동 집을 나와 광주천 너머 사직공원과의 접경지역 추억이 그나마 더듬더듬 양림동의 흔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팔각정, 대숲, 대나무 발스케이트, 목검, 핀둥이... 광주 시내가 한 눈에 조망되었던 팔각정. 목검을 깎아 들고 사동 패거리들과 한 판겨루곤 했던 대숲 넓은 공터. 눈이 많이 쌓이면, 팔각정에서부터 굽이굽이 내리 돌아 KBS방송국을 끼고 양림파출소 앞까지 내달렸던 대나무 발스케이트. 동네 형들과 함께 저녁 후 멱 감던 한 여름 밤의 피서. 까맣게 구물거리던 핀둥이를 쓸어 담느라 땀범벅거리며 내달았던 그 넓은 산야들...안간 힘을 쓰며 양림동 비스므레한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그런 정도의 추억만 남아 있을 뿐이니, ..

카테고리 없음 2022.05.10

産業革命을 통해 들여다 본 善과 惡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공연을 관람했다. 월드투어로 홍보했지만 지방으로부터 시작하여 맨 마지막으로 서울에서 대단위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방식. 그러니깐 아직 서울 친구들은 구경도 못한 뮤지컬이다. 그래서 뮤지컬 그 자체 얘기는 생략하기로 한다. 20년 쯤 전의 뉴욕 출장 길. 스케줄이 꼬여 주말에 체류해야하는 상황이 발생했는데 가깝게 지내던 후배가 현지 주재원이라 기꺼이 같이 할 수 있다는 제안도 뿌리치고 어려워하는 녀석을 뒤로 하고 만난 대상이 바로 나의 생애 첫 ‘지킬 앤 하이드’였다. 갑작스런 선택이었으니 상당히 비싸게 지불했던 기억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더 큰 에피소드가 있다. 그러나 엉뚱한 상상은 마시라. 이 곳 광주 공연에서처럼 양 쪽 자막은 있었지만 영어로 진행된 줄거리 따라 가기에도 애를..

카테고리 없음 2022.05.10

사회(社會), 동·서양의 다른 역사성

사회, 우리가 가장 널리 구사하고 있는 어휘 중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 말을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모든 형태의 인간 집단’을 가리킬 때 사용한다. 작게는 「친구」나 「가족」에서부터 우리가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사회」 뿐만 아니라 「국가」와 「인류 사회」까지 모두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어휘이다. 우리는 흔히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런 규정의 기원을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찾는다. 그러나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 지칭한 바가 없다. 「사회」 또는 「사회적」이라는 말은 그리스 시대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정치적 동물(zōon politikon)’이라 불렀다. 나중에 세네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희랍어 텍스트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과정..

카테고리 없음 2022.05.10

마스크

「미세먼지」가 기승이다. 이 어휘는 이제 일반 국민이면 누구나 쉽게 이해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어린 시절, 송홧가루가 날리는 철이 되면 하얀 보자기를 들고 나가 인근 산야를 쏘다니며 받아오던 노란 꽃가루에 대한 기억이 새롭다. 그 시절의 공기는 언제나 맑고 상쾌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송홧가루와 더불어 산업화로 인한 먼지와 중국 황사를 범벅으로 느끼면서 비로소 우리는 공해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새 어른이 되어, 주차했던 차 위에 수북이 쌓여있던 누렇고 지저분한 흙먼지를 보고 송홧가루에 대한 추억에 빠져들 틈도 없이 날로 더해가는 우중충한 하늘을 걱정하면서 먼 미래에 닥쳐올 막연한 재앙 정도로 미뤄두고서 긴 시간 잊고 살아온 터였다. 그러던 세월도 한참 더 흘렀다. 언제부터였던가. 어느 날인지 ..

그때 생각들 2022.05.10

아쉬운 마무리

온라인이지만 시간이 가니 학기도 바뀌었다. 새 학기 즈음에 으레 맞는 이 기분. 우선 학생들이 궁금하고 지난 학기의 후회와 아쉬움을 딛고 새로 감당해야 할 각오와 다짐 그리고 적절한 나름의 원칙 같은 것들이 있다. 여기까지가 내가 겪었던 일반 사회의 학기 전 현상이다. 그러니 새 학기를 맞는 느낌은 늘 이렇게 새로운 각오와 희망, 그리고 기대가 절대적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다르다. 가르쳐야 할 대상의 윤곽. 새 학기 시작 겨우 2주 전이라야만 나는 내가 전념해야할 수업의 범위를 더듬더듬 알 수 있다. 그 2주부터는 부리나케 수업 준비를 할 수 있다. 그 전에 그것을 묻는다면 경을 칠 노릇이 된다. 여기 온지 1년이 넘었지만 한 번도 교원의 희망 사항조차 묻는 법이 없었다. 어찌하여 난 중급 주중반과 고..

인도 2022.05.10

아직은 이해 곤란한 나라

65가 넘은 나이에 겪은 나의 인도 생활은 참으로 귀중한 체험이었다. 가끔 남은 인생을 돌아보고 살아가는데 꽤 많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다. 보통 사람이 겪지 않은 체험을 난 이제 몇 개 더 가진 셈이 된다. 그래 부자가 되었다. 내가 겪은 인도의 이미지는 대충 이렇다. 일할 수 있는 인구는 많지만 폐쇄적인 카스트의 굴레 속에서 속절없는 유리 천장에 갇혀 지내는 사람이 더 많은 나라. 그렇게 유지되어온 사회적 인습과 구조. 수천 년 지속되어온 신에 대한 믿음 속에서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살아가다 대를 이어가며 똑 같은 생활을 되풀이하는 기층민들의 안타까운 삶들. 같이 살아보며 삶에 대한 생각을 나눠본 적은 없었지만 나 같은 이방인의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대체로 그런 저런 이유로 슬프게 비쳤다. 쉽게 ..

인도 2022.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