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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 학구당

늦깎이1 2023. 2. 8. 00:55

조선시대의 담양에는, ‘학구당이라는 사립교육기관이 있었다. 다른 지역의 서원이나 서당과 같았지만, 특정인의 학풍을 본받도록 주입하지 않았고 주로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곳이었다. 당연히 급제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광주에서 고서로 들어와 광주호 댐에서 왼쪽 고샅길로 방향을 틀어 오르면 바로 수남학구당이 나온다. 소쇄원, 환벽당, 식영정을 끼고 도는 증암천에서 가사문학이 탄생되었고, 그 증암천을 기반으로 인공호수를 조성했으니 넓은 들판과 만나는 바로 그 초입에 학구당이 생긴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 듯도 하다. 가깝게 보이는 무등산의 옆얼굴도 그런 분위기에 잘 어울린다.

 

창평읍에서 가까워 창평학구당이라고도 불렀다. 선조 때 지역의 25개 성 씨가 힘을 합쳐 창립했으며 과거 합격자나 지역 명문가들이 교재와 학사규정을 엄격히 세워 지역을 위해 스스로 봉사했다고 알려진다. 그런 정도의 교육열은 당시의 정치경제상황에 비추어 볼 때, 풍족한 생활과 집성촌을 이룬 양반가의 융성, 그리고 엄격한 유교문화 등이 어우러진 지역사회가 아니고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 아니었을까. 송강 정철의 어린 시절 놀이터 증암천과 충장공 김덕령 사당이 바로 이곳에 있고, 아시아 최초로 지정된 창평 슬로시티는 당시의 그런 정치경제상황이 만들어내고 꾸준히 유지시켜온 뚜렷한 증거가 아니던가. 지역 유지들이 공동 설립했으니 그저 그런 서원이나 서당보다는 학구당이라는 특별한 명칭이 모두에게 절실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입구 어딘가에 과거 합격자 명단을 내건 플래카드가 펄럭이고 있을 것만 같다. 3년마다 치르던 식년시 결과 풍경을 상상해본다. 학구당의 출입문격인 긴 돌계단 끝의 닳아져 오목해진 문턱이 보인다. 얼마나 많은 유생들이 청운의 뜻을 품고 넘나들었을까.

 

학구당의 본당이다. 정면으로 5칸에 방이 동서로 2개씩 구분되어 있다. 아마도 과목별 수업이 동시에 나눠 이루어진 듯싶다. 정면에 학구당이란 현판이 크게 걸려 있고 오른편엔 수남학구당 추계 교양강좌란 현수막이 있다. 당시의 정신을 되살려 지역민들을 대상으로 한 교양강좌를 개설했던 모양인데,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던 듯싶다. ‘학구당현판 뒤에 또 하나의 작은 현판이 보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삼봉서사(三峰書榭)라 적혀 있다. 3개의 산이 뒤에 배열해 있으니 三峰은 알겠고, 는 확실한데 가 아리송했다. 한자 사전을 펼쳐 찾아보니, 道場이란 의미로 해석하는 게 좋을 듯싶었다. 혹시 다른 고정된 의미가 있다면 그건 나중에 확인하면 될 일이다. 여긴 관리인이 기거하는 곳인 듯싶다. 인기척은 없는데 음악소리가 나직이 그치지 않는다. 사설교육기관이니 후손들 중 누군가는 선대의 뜻 깊은 유산을 소중히 지키고 기려나가야 할 일이다.

 

여긴 문루로 불려진다. 층간 높이가 썩 크지 않아 좀 어색하긴 하지만 문루는 2층으로 지어졌다. 아래쪽은 아궁이가 있고 위쪽은 마루가 있으며 방 한 칸과 문 위로 조그만 벽장이 있다. 문루의 주된 특징은 확 트인 조망이다. 외부로 난 문을 개방하면 증암천을 중심으로 전개된 너른 평야와 왼쪽 시선을 깊이 올려 무등산까지 감상할 수 있었다. 학구당 본당 마루에서 천정을 바라보면 시렁이 보인다. 이 시렁은 과거에 책을 보관하던 서고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아래는 아까 입구 돌계단 끝으로 올려보았던 출입문이다. 지금은 굳게 닫혀 있지만, 한 때 왁자지껄 오가며 문턱을 밟던 수많은 유생들의 모습이 눈앞을 스치며 사라지는 환영을 본다.

 

수북학구당. 영산강 본류로 흐르는 지천을 중심으로 북쪽에 있다하여 수북학구당이다. 성종 때 3개 성 씨가 공동으로 설립했으니 수남학구당보다 먼저이다. 병풍산 자락까지 찾아 구불구불 꽤 멀리 왔는데 길이 좁아 50m 정도를 차를 버리고 오르니 입간판이 먼저 보인다. 백구 한 마리가 인기척을 느끼고 내려왔다 나를 발견하자 꽁지 빠지게 돌계단으로 올라가 짖기 시작한다. 어디서 나왔는지 우람한 또 한 마리의 백구가 더 크게 왕왕거린다. 쌍으로 짖어대니 정적 속의 병풍산이 갑자기 소란스럽다. 급한 경사를 이룬 돌계단 위로 굳게 닫힌 출입구가 보인다. 문은 닫혀 있고 인적은 드문 수북학구당. 당시 수학을 위해 오르내리던 유생 하나가 호랑이에 물린 사고가 생겨 300년간 철폐한 후, 숙종 때에 지금 이곳에 중건했다 다시 현대에 들어와 복원작업을 거쳐 신축을 했다 한다. 어쩐지 돌계단의 짜임새와 주변의 배치, 그리고 목재로 만든 출입문의 채색하며 문턱의 닳아진 상태 등이 먼저 둘러보았던 수남학구당보다는 더 나중인 듯하더니. //별 수 없이 드론을 올려 본당을 내려 보기 시작한다. 정면으로 4, 측면 2칸에 목조 팔작지붕이며, 기둥은 원주모양 양 귀퉁이에 각주를 세웠다. 앞쪽에 퇴(退)를 두어 마루를 깔고 창문은 띠살문을 달았다.

 

다시 수남학구당이다. 學求堂이란 한자의 의미를 곱씹어보기 위해서다. 현대의 우리는 배울 에 연구할 가 훨씬 익숙하다. 근데, 여기선 분명히 구할 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왜 구할 인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배움을 구하는 집으로 해석해 보고나니 이제는 그 배움의 목적이 궁금해진다. ‘공부였을까. ’학문이었을까. //중고교를 6년간 같이 다닌 친구 M이 있었다. 앞뒷집 살면서도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다. 난 공부보다 글과 그림으로 친구들 간에 꽤 유명세를 치렀었다. 졸업 후 M은 다니던 은행을 그만 두고 독일 유학을 갔고 난 S전자의 해외영업맨이었다. 독일 출장 중 M과 만났고 그때부터 우리는 친해졌다.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 의문은 있다. 학구당의 한자가 왜 구할 인 것처럼, M은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독서량을 자랑했고 학문의 영역에서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런 말본새가 좀 유치하고 별나 보였으나 우리는 계속 친구였다. M은 박사학위 취득 후, 귀국하여 교수가 되었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그만 재임용에 탈락해버렸다. 당시 이웃 대학에 교수로 있던 내 아내가 그를 돕고자 외부 특강을 맡겼다가 사소한 말 오해로 그 불똥이 내게 튀었다. 그 후로 우리는 안 만난 지 오래다. M은 대법원에서 승소했으나 대학에 복귀하지는 못한 채 지금 정년 나이를 넘겼다. //우리는 왜 학문을 할까. 과거에도 과거합격 자체만을 위해 책을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2023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