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초 우연히 알게 된 ‘외씨버선 길’로 계획한 이번 여행은 장마로 1주일 연기한 끝에 드디어 결행했다. 가야겠다고 생각하면 행동에 옮기면 그만인 것을 ‘결행했다’고 표현한 까닭은 나름대로 모종의 의도가 있었다. 환갑 진갑 다 지난 늦둥이 교수로서의 생활도 막바지에 이른 지금, 은총과 재앙이 함께 하는 믹스트 블레싱(mixed blessing)시대를 그저 평소 발걸음으로 걸어 들어가서는 안 되겠다는 조바심이 제일 컸다.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문제는 지금까지 늘 마주쳐왔던 ‘학교생활과 회사생활 그리고 가정생활’이라는 명제와는 달리 좀 무거운 주제였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 편차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우리는 인생의 단계마다 새 출발의 축복 속에 시작해 왔고 다음 단계에 새롭게 다가 올 패자부활전을 기대하면서 끝없는 경쟁 속에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맞게 될 단계는 지금까지와는 다를 듯하다. 노후문제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자신 있게 스스로의 계획에 대해 노출하기를 꺼려할 수밖에 없다. 가족들과의 생활과 관계 속에서 어색해져있는 자신과 생활의 소소한 부분에 신경을 써야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게 되는 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렇게 엉거주춤 망설일 수는 없는 일이다. 현직에서 변방으로 물러 나 의기소침해진 자신을 추스르고 앞으로 남은 인생에 대해 어떻게 살아내야 할지 이제 스텐스를 바로 잡아야 한다. 이번 내 여행의 출발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일어나 준비하려는데, 어제 밤에 꾸려둔 배낭 옆으로 삐죽 나와 있는 흰 봉투가 눈에 띈다. 펼쳐보니 막내의 쪽지와 함께 금일봉이 들어있다. 이번 여행 결과와 무관하게 아빠의 ‘나 찾기’ 시도를 응원하며 자신이 설레는 느낌을 갖는다고 적었다. 조용한 아침, 혼자 나서는 여행길에 상쾌한 공기가 목덜미를 스친다. 바로 가는 차편이 없어 생각 끝에 동대구행 KTX로 미리 예매해 둔 터였다. 항상 주차문제가 심각했던 걸 생각하여 택시를 탈까하다가 괜찮을 거란 믿음으로 차를 몰았다. 다행히 주차장은 여유가 있었다. 이른 시각이었음에도 역사는 붐볐다. 휴일 아침 이 많은 사람들이 무슨 일로 이렇게 바쁜 길을 서두를까? 나와 같은 차림을 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다들 이렇게 사는구나. 한 걸음 늦게 살고 있는 내가 차라리 후회스러웠다. 어쩌면 이번 여행길에 난 많은 후회를 할 거란 생각이 밀려왔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려면 과거의 일을 먼저 반성하는 일이 우선이다. 반성의 결과는 후회이고 후회의 내면에는 진한 다짐이 깃들기 마련이다.
전라도에서 나고 자란 내가 어이하여 경북 영양 골짜기까지 가서 나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는 나도 알 수 없다. 내가 좋아한 詩句 ‘외씨버선’에 이끌려 그리 되었을 뿐. 무등산 골짜기라 한들, 뉴질랜드 카우리 숲이라 한들, 실체 속의 나는 이미 소진되어 찾을 것이 없다. 실체 속의 나는 그저 빈 껍데기, 한갓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어차피 나는 프로이트가 말한 ‘自我’ 속에 존재할 뿐이다. 그 속에서 본래의 나를 찾는 것을 이번 여행의 목적으로 정한 것이다.
오송역에서 환승해야 한다. 그 구조가 궁금했지만, 닥쳐서 견디는 것으로 하고 여행의 운에 맡겼다. 그러나 환승해야 하는 동대구행 KTX의 통로는 오송역에서 불과 5분 이내의 위치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인터넷에서 조회해봤더라면 하는 후회가 내 첫 번째 후회가 되었다. 나는 결국 게을렀고 철저하지 못했으며 아직도 運七技三 같은 것에 의존하는 심약한 중늙은이가 되어 있었다.
동대구역은 복합환승터미널을 보유한 도심의 거대한 교통 센터였다. 생각해보니 대구는 국제노선을 취항하는 비행기의 존재와 함께 쾌적한 시민의 삶을 보증한 대한민국 최고의 도시였다. 대통령을 4명씩이나 배출한 도시이니 그 정당성은 차치해 두고서라도, 현직에 있을 때 휘둘렀을 권력의 전횡으로 천문학적인 세금을 쏟아 부어 만든 괴물 같은 도시. 잠시 소름이 오싹 돋았다. 국정원 특활비를 받은 게 사실이라면 동대구역에서 할복하겠다고 말했던 이 지역 출신 모 국회의원은 지금 감옥에서 아직 할복도 못하고 있다. 감시가 엄중한 탓이리라. 사실 복합환승터미널은 대구뿐만 아니라 광주와 비슷한 인구를 보유한 대전도 벌써 운영되고 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광주는 시장이 바뀌면서 지금까지의 논의를 뒤집고 복합환승터미널 대신 주차장만 확충하겠다는 신문 보도를 최근 접했을 뿐이다. 민간 건설업자가 운영할 주차장 운영비 조정이 실패하자 그런 축소 방침으로 선회했다니 참으로 한심할 노릇이다. 공공성과 확장성을 예측하여 발전적인 도시 건설을 책임져야 할 신임 시장의 속 좁은 결정이 또 이 도시를 얼마나 위축시킬지.
고교시절 수학여행 길이었다. 광주를 벗어나자 8대의 버스는 털털거리기 시작했다. 먼지를 잔뜩 일으키며 돌무더기로 가득 찬 비포장도로를 소음을 뒤집어 쓴 채 비틀거리며 달리고 있었다. 피곤에 겨운 버스가 그렇게 몇 시간을 달렸을까 ‘하동’ 이정표를 지나자마자 버스는 갑자기 쾌적한 경적을 울리며 빠른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하동에서의 경악을 필두로 우리는 경상도 땅을 벗어날 때까지 수학여행 길 내내 오금저린 기억을 가슴 저 깊은 곳으로 몰아내며 견뎌야했다. 몰락한 비운의 집안 내력을 가슴 속 깊이 숨긴 채 살아가던 한 소년이 우연히 방문한 동급생의 집, 대궐 같은 적산가옥 곳곳을 보고 느꼈을 처지랄까. 졸업한 지 50년이 다 되어가는 최근, 어느 동창생과 그 어린 시절을 더듬던 대화 중에서 나는 놀랍게도 나 외의 많은 친구들이 그 시절의 기억을 또렷이 가슴에 담고 살아왔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적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동창생이라면서 50년 가까이 털어내지 못했던 시름을 막걸리 한 사발로 날려버렸지.
경북 영양은 안동에서 버스를 갈아 타야할 만큼 벽촌이었다. 그래 우선 안동까지의 고속버스에 몸을 실으니 동대구역의 위용을 자랑하듯 몇 층이나 되는 터미널을 돌고 돌아 대구 시내를 누빈다. 주말 오전이었지만 대구는 역시 큰 도시였다. 살아 움직이는 짐승처럼 꿈틀거리며 덥기로 소문난 대구 분지를 분주하게 빠져 나왔다. 칠곡 일부가 대구광역시에 편입되어 북부로 향하는 고속도로가 칠곡 지역에서 극심한 정체를 빚는다.
안동은 예전 회사시절, 1억불 이상 수주한 큰 거래선이 방문하면 링컨 타운 카 리무진을 회사에서 대절하여 하회마을을 돌던 경험으로 꽤 오래 전에 인연이 있던 곳이지만 최근 5월 초 주왕산 관광차 이 곳에 왔다가 문제의 ‘외씨버선 길’ 팻말을 발견한 곳이기도 하다. 역사에서는 안동과 의성 김 씨의 오랜 세도정치 덕분에 조선 후기를 통째로 아울렀던 양반 족벌의 본향임을 일러준다. 새로운 권력을 나눠 가질 외척 사림들의 수도권 집중현상과 함께 삼정의 문란 등 권력 농단의 폐해로 조선 멸망의 단초를 이끌어낸 사실을 상기해 보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그들의 가문에 대한 자부심은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근거한 것인지 역사학자들은 또 뭐하고 있었는지 한심할 따름이다. 이것은 공개된 역사의 조각들로부터 시작한 편향된 내 사고의 넋두리일 뿐, 관련 가문의 후예가 되는 친구들과 논쟁을 벌일 생각은 결단코 없으며 나의 일천한 지식이 이를 포용할 틈 또한 없음을 미리 밝혀둔다.
영양행 버스 안은 사람 냄새를 물씬 풍기며 왁자지껄 시골 장터처럼 시끄러웠다.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를 자세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오랜만에 시집간 딸래미로부터의 안부전화, 방금 다녀온 안동 병원에서 들은 의사와의 대화, 고추농사가 예전만 못해 걱정이 많다는 이야기들로 마구 떠들어대고는 있었지만 듣기가 불편하지는 않았다, 급경사가 많은 시골 길을 버스는 능숙하게 회전하며 벽촌 입구에 많은 승객을 토해 냈다. 영양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이기가 무섭게 가로등 밑에 매달린 빨간 고추 조형물로 여기가 바로 유명한 청양고추 산지임을 짐작하게 되었다.
영양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숙박문제와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조지훈 문학 길을 목적지로 한 트래킹을 먼저 착수해야 했다. 영양객주가 상주한다고는 했으나 주말인 관계로 다른 객주에서 전화를 받으니 도움이 되지 못했다. 정류장에 매점이 없어 읍내 편의점까지 걸어가 배낭을 멘 채로 물 2병을 쑤셔 넣었다. 여행 오셨습니까? 예, 외씨버선 길이요. 내가 대답했지만 못 알아듣는 것 같아 다시 물었다. 조지훈 문학 길 가려는데요. 편의점 주인이 그 때서야 알아듣는 표정을 짓는다. 혹시 다른 일행 등이 이미 출발했는지를 물었으나 편의점 주인의 대답은 의외였다. 외씨버선 길 찾는 사람이 몇 년 전까지는 꽤 있었지만 최근 들어 거의 없다는 말과 함께, 버스가 일찍 끊기니 역방향으로 목적지인 주실마을까지 버스타고 갔다가 이곳까지 5시간 정도 트래킹 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한다. 그의 말대로 버스를 다시 탔다.
주실마을까지는 20분 정도 걸렸다. 영양 지역이 전체적으로는 산세가 좀 험한 모양새였지만 주실마을 주변은 잘 정돈된 평야의 형국을 보였다. 조지훈 생가와 시 공원 그리고 문학관을 살펴보는 것이 오늘 일정의 전부이다. 그러나 주실마을 바로 뒤 배경을 바라본 나는 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실마을 남서쪽 앞 논 너머로 나직한 동산 셋이 뚜렷이 눈에 들어 온 것이다. 얼핏 주워들은 풍수지식으로 가운데 있는 산이 문필봉일듯하여 나중에 확인하려니 하고 사진을 찍어 두었는데, 문학관에 가 확인해 보니 내 짐작이 사실이 된 것이다. 왼쪽이 노적가리를 닮은 노적봉, 가운데가 붓을 닮은 문필봉, 맨 오른쪽 조금 보이는 것이 연적봉이라는 것이다. 露積은 먹을 것 걱정 없이 풍성한 富를, 文筆은 학식과 문장이 빼어난 人才를 상징하고, 먹 갈 때 물 담아두는 硯滴까지 있으니 선비와 학자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는 명당이라는 풍수설. 이쯤 되면 내 풍수지식이 허당은 아닐 듯.
壺隱宗宅 솟을대문 위 홍살 중앙에 갖다 붙인 태극 문양에 선명한 사괘가 이채롭다. 宗宅 안에서 보인 중앙의 뚜렷한 문필봉이 역시 날 가만 두지 않는다. 宗宅이 얼마나 문필봉을 정면으로 대하고 있는지. 그리고 바르게 서있는 문필봉. 삐딱한 문필봉을 보며 자란 후손 가운데는 曲學阿世의 polifessor나 서정주처럼 권력에 아부했던 문인도 나온다는데.
주실마을 언덕길을 내려가다 왼쪽으로 조지훈 詩 공원을 마주친다. 洗心亭이란 정자와 石物詩碑가 늘어선 매방산 정상까지는 800미터 정도. 시비가 하나 둘 도열해 있다. 무려 27개의 이 석물시비를 조성하는데 투입된 비용도 비용이거니와 정성이 가히 눈물겹다. 내가 좋아하는 시는 ‘승무’, ‘낙화’, ‘완화삼’ 정도. ‘승무’와 ‘낙화’는 학창시절 한 자도 빼지 않고 다 외웠고, ‘완화삼’은 같은 청록파 시인인 박목월과 주고받은 시로 유명하다. 지훈이 먼저 ‘완화삼’을 보내면서,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七百里)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 마을의 저녁노을이여. 하자,
목월이,
길은 외줄기
남도(南道) 삼백 리(三百里)
술익은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로 화답하며 ‘나그네’를 건넸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운치 있는 낭만적 풍류이며 조응하는 시구인가.

이제 본격적으로 조지훈 길을 들어 설 차례. 역방향으로 주실마을부터 시작했으니 이제 영양읍 쪽으로 트래킹해야 한다. 데크로 잘 조성된 숲 길 초입에 건립된 조지훈 문학관을 들러 그의 일대기가 정리된 문학적 거인의 일생을 보면서 나의 초라하고 변변치 못한 삶이 얼마나 대비되는지를 한 동안 흐느꼈다. 그러나 흐느낌은 흐느낌일 뿐, 나는 그가 아니다. 나의 미래는 이제부터 시작이며 그 다른 길을 어떻게 이제부터 살아내야 하는지를 고민하기 위해 이 트래킹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려면 농로와 수로로 연결된 대부분의 예정된 길을 걷는다는 것은 의미가 없을 듯했다. 지도를 살펴보니, 내가 예상했던 숲길은 이 곳 주실마을 뒷길로 난 산 속이었다. GPS와 물 컵에 붙어있는 나침판 그리고 평소에 익혀놓은 독도법이라면 내가 숲길에서 실종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듯싶었다.


숲길로 접어들자 금방 더위가 가셨다. 이름 모를 풀벌레들이 길을 재촉하는 듯 발걸음에 박자를 맞춰주었다. 나는 여기서 내면의 自我를 과연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지금까지의 나는 조직과 단체, 그리고 수많은 모임의 이름으로 여럿 중의 하나였다. 항상 상대할 대상이 존재했다. 그의 반응에 적절히 응수하면 되는 세계에서 나의 존재를 自我 속에 파묻어버리고 큰 불편 없이 살아 왔다. 지금 당장이야 하던 일이 있으니 그대로 하면 되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금방 혼자가 되고 만다. 혼자 왔으니 결국은 혼자 가야겠지. 이제부터는 나라는 본질과 마주하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가 온 것이다. 다시 말해 혼자 노는데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일도 혼자 노는 일 중의 하나다. 가끔 당구장에서 싸구려 음식점 주변에서 시내 어딘가에서 머리가 허연 노인네들이 아무렇게나 걸쳐 입은 차림새로 우루루 떼를 지어 몰려다니던 것을 바라보며 참으로 처량한 눈길을 주었던 나다.
실존주의에서는 자아, 초자아, 이드라는 용어를 써서 인간 내면의 단계를 구분한다. 내가 찾아내려고 하는 자아는 본능을 누르면서 동시에 본능으로부터 오는 충동을 만족시키려하는 나의 본질이다. 이 세 가지 내면의 요소가 균형을 잃고 깨지면 실존주의로서의 자아는 사라진다. 내면의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는데 이 고통의 현상으로 자살충동, 우울증, 조울증, 조현병 등이 발현된다고 들었다. 이런 것들은 어느 날 갑자기 발병한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반복되어진 상처이거나 자아(에고)가 현실적응에 실패하면서 허상의 쌍둥이 자아(이드에 근접한 에고)를 만들어 내면서 발병한다. 이를 물리치려면 순수이성으로 나의 본질을 바라볼 수 있는 초자아를 인식으로 끌어 와야 한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너무 깊숙이 들어와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아에 대한 내 사고의 깊이가 이처럼 멀리 진행한 적은 가끔 있었다. 그러나 자아 속으로만 진행하다 물리적인 나의 실체를 간과해버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숲속 한가운데에까지 와버린 내가 있었다. 한 30여분이 흐르도록 숲으로만 지나왔으니 주변이 벌써 어둡다. 스마트 폰의 GPS엔진이 위성을 잡지 못한다. 그러니 내비가 가동될 리 없다. 이 어두운 숲길 저 쪽 끝에는 카우리 숲길에서 느꼈던 숲의 정령이 있을 것만 같다. 쥬라기 공룡들이 놀던 원시림 숲의 제왕 2,000살이 넘은 ‘타네 마우타’의 우람한 형체가 환영처럼 다가왔다. 마오리족 ‘하카’의 강한 소리가 귀를 울리며 부릅뜬 눈, 길게 내민 혀로 날 위협하는 듯 했다. 그렇지 은고사리나무 잎. 그들은 숲에서 길을 잃으면 은고사리나무 잎에서 반사되는 빛을 보고 빠져 나온다고 했지. 주변을 둘러 봤지만 여기에는 은고사리나무가 있을 턱이 없다는 사실을 나는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겁이 덜컥 났다. 그러나 이 정도로 내가 조난당할 수는 없다. 아까 주실마을에서의 기억을 더듬어 나침판으로 방향을 잡고 20분 정도를 걸어 나오니 GPS와 네비는 물론 주변이 환해졌다. 지훈이 어린 시절 뛰놀던 뒷산도 이처럼 울창한 숲길이었을까.
얼마 전 내린 폭우로 개천이 범람하여 당초의 조지훈 길은 도저히 걸을 수 없었다. 어쩔 수없이 차가 다니는 도로로만 영양읍까지 터벅터벅 걸어오니 8시 반이 이미 넘어 있었다. 4일과 9일의 5일장이 서는 영양전통시장에 가면 풍족한 시골 인심의 저녁을 즐길 수 있으려니 생각에 허기가 몰려왔다. 1918년부터 동해안의 싱싱한 수산물과 내륙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물물 교환하는 시골의 큰 장이라고 적혀있던 것을 기억에 떠올리며, 장날은 아니더라도 날 실망시키지는 않겠지. 그러나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20분 이상 적절한 음식점을 찾아 헤맸으나 피곤에 지친 나의 심신을 달래줄 레스토피아는 그 곳엔 존재하지 않았다. 9시가 넘어 어쩔 수없이 그 때까지 문을 연 국밥집 문을 두드렸다.
모듬 수육 1접시와 막걸리를 주문하니, ‘경주 법주 쌀 막걸리’를 내놓는다. 60을 갓 넘겼음직한 펑퍼짐한 인상의 주모가, 영양은 경북 도내 다른 군보다 상대적으로 인구감소의 폭이 가파른 추세여서 정치, 경제, 사회 전 부문에 걸쳐 쇄락해가는 과정에 있다는 말을 한다. 영양 생 막걸리도 몇 년전까지 영업을 했으나 수요가 줄어들어 문을 닫았다한다. 전통시장의 형편을 물으니 영양군에서 기를 쓰고 회생하려 노력하고 있으나 역시 인구감소로 인해 얼마가지 않아 시장도 문을 닫지 않을까 우려한다는 푸념이다. 다문화 가족들의 유입으로 활로를 찾아야 하지 않겠나했더니 젊은 아이들이 씨가 말라서...라며 말끝을 흐린다. 국가적 난제인 저출산 고령화 문제가 시골이 더 심각하다는 말을 듣고는 있었으나 고향이 아닌 현장에 와서 피부로 느낀 셈이다.
어린 시절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었던 표어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그러다가 2000년대에 들어와서 ’자녀에게 가장 큰 선물은 동생입니다‘로 선회하였다. 자료를 찾아보니, 지난 10년간 100조원에 가까운 정부 예산을 투입했지만 출산율은 제자리에 머물렀다. 왜일까? 아마도 정책결정자인 베이비붐세대가 출산가능자인 에코붐세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지 싶다. 에코붐세대에게 출산은 선택이지 의무가 아니다. 정부가 출산 장려금과 양육수당을 제공한다고 해서 이들이 출산을 곧 결심하지는 않는다. 나만 해도, 지난 설날 사위와 함께 세배 온 딸에게 손자 얘기를 했다가 초죽음이 되지 않았던가. 출산을 독려하기 위한 최근의 대표적 표어가 ’결혼은 행복의 시작, 출산은 희망의 시작입니다‘이다. 이 표어를 보고 공감하는 젊은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정책결정자들의 겉도는 행정의 단면을 발견하고 새삼 실소를 금치 못할 뿐이다.
‘나를 찾아야겠다’를 정리해야할 지점에 다다른 듯하다. ‘외씨버선 길’을 매개로 한 사색의 숲길. 나는 나를 찾았을까. 지금껏 오늘의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 숨 가쁘게 달려온 나는 이제 좀 여유 있는 호흡의 숨결로 내일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가야함을 터득했을 뿐이다. 물론 혼자서도 지치지 않는 자세로 말이다. 어차피 인생의 긴 행로는 나를 찾아가는 여로일 듯하다. 여행의 목적지보다는 그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다채로운 행로 그 자체가 여행이듯 말이다. 목적지만 의식한 여행은 출발과 도착 외는 보잘 것이 없게 된다. 그렇다면 삶과 죽음만 있는 인생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뿐이다. 이 얼마나 악랄한 비유인가. 삶과 죽음의 중간 어디쯤에 와있는지 아무도 그 황금비율은 가늠할 길이 없다. 그러니 나의 나를 찾는 과정은 아직도 진행형인 것이다.
당송 8대가로 유명한 歐陽脩는 ‘三上에서 좋은 생각이 떠오른다’고 하면서 枕上, 馬上, 廁上에서 사색할 것을 권유했다. 잠들기 전, 말 위에서, 화장실에서 사색하라고 했으니 오늘로 치면 ‘멍 때리기’ 좋은 곳을 가리킨 듯하다. 그의 지적이 가히 천재적임은 따로 설명할 것이 없을 것이다. 생각이 확산하기 쉬운 장소나 상황에서는 과거의 기억과 새로운 기억이 서로 연결하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부터 잠들기 전, 차 속에서, 화장실에서 가끔 ‘멍 때리기’를 시도하며 나를 찾는 작업을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2018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