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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천저수지

늦깎이1 2022. 5. 10. 22:19

올 장마는 이렇게 지나가려나?

 

며칠 남부 지방에 피해는 몰고 왔지만 전국적으로는 특유의 줄기찬 비 소식 없이 습도만 높은 날씨의 연속. 하지만, 종일 제습기만 가동하며 갇혀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긋지긋한 장마철 끈적거림에도 이골이 난 터였다. 반짝 해가 비치자, 오래 기다렸었다는 양, 서둘러 운동화 끈을 조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자기암시가 될 수 있도록 속으로도 여러 번 되뇌었다. 간절하게.

 

세종학당 계약기간도 끝났고, 확실한 은퇴생활에 돌입하면서 혼자만의 다짐을 한 게 있다. 간단하다. 십 일간 세 권 이상은 책을 읽는다. 매일 만 보 이상 걷기를 반드시 실행한다. 책 빌려보는 일이야 어려울 것 없지만 계절과 기상 상태에 따라 기복이 많은 걷기는 너릿재 숲길과 운천저수지+518 기념공원으로 미리 정해 두었다. 너릿재 숲길은 오래 전부터 옛길로도 정평이 나있는 곳이지만, 멀리 가지 못할 경우에는 가까운 운천저수지가 늘 머릿속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운천저수지는 내게 추억거리를 꽤 담고 있다. 고교시절 친구 따라 처음 낚싯대를 드리워봤던 곳이었다. 그때부터 시작한 낚시를 민물, 바다 가리지 않고 탐닉했다. 해외출장길 희귀 낚시터 탐색을 주문하는 통에 주재원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곤 했었지. 민물에 입문했다가 바다로 오랜 외도, 나이 들어 다시 민물로 회귀하는 게 낚시라고 했던가. 그래 요즘 들어 슬슬 장비를 점검하며 중층낚시 서적을 뒤적이는 중이 아니던가. 유난히 흰 얼굴의 기억밖에 남지 않은 이름 모를 한 여학생과의 아스라한 뱃놀이 추억이 지금껏 남아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땐 앞 군부대를 제외하곤 주변이 온통 논밭이었지. 5번 버스 타고 돌고개에 이르면 추가요금을 받아가던 수줍은 미소의 차장 얼굴을 애써 외면하면서 신학대 옆 고샅길 언덕의 시원한 숲길, 피정센터며 드문드문 심어진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 차창 사이로 난 휑한 신작로를 무심코 바라보고 있으면 이내 상무대 앞이요~’하던 차장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직장생활로 고향을 떠난 꽤 오랜 기간은 그저 바쁘게 지내다가 다시 고향을 찾으면서 운천저수지가 자리한 금호지구에서 죽 생활을 해왔다. 주변의 논밭을 밀어내고 신도시로서 막 개발을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고 있다.

 

십여 년 전 건강을 잃고 큰 수술 끝, 재활을 위해 다시 찾은 동네에서 매일 하루 세 번 걷기를 시작한 곳이 또 운천저수지이기도 했다. 체중이 40kg로 줄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공중으로 흩어지려는 내 몸의 착시를 느꼈다. 많이 변해 있던 저수지 주변을 돌면서 코끝에 알싸하게 와 닿던 어슴푸레한 기억들, 생명에 대한 감격과 경외로움을 동시에 느끼며 미켈란젤로가 일찍이 경험했다던 신 앞에 있는 나를 발견했다. 철따라 모든 것에 순응하며 변하고 있던 만물 속 자연을 천천히 돌아볼 기회를 얻었다. 봄이면 매화, 벚꽃, 철쭉이 시새워 피고 여름이면 홍련과 배롱나무...왕벚꽃이 만개하면 주변 도로가 몸살을 앓던 이 저수지 주변을 난 지금도 걷고 있다.

 

장마철 잠깐 소강상태의 거리는 빠르게 마른 습기가 아직도 대기 속을 빠져나오지 못한 때문인지 여전히 후텁지근했다. 그래도 기분은 상쾌했다. 운동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떨쳐버리기 위해서인지, 오랜만에 운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는 만족감인지,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기분에 저절로 걸음이 빨라졌지만 난 보폭을 그대로 유지했다.

 

운천저수지는 그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지금 역시 지하철 2호선 중 저수지 밑으로 관통하는 노선 공사가 진행 중이다. 분수대 가동을 중지하고 물을 다 빼서 중앙 섬 등 일부 통제 구역은 생겼지만 주변을 도는 정도의 운동은 큰 불편 없이 할 수 있다. 지하철 입출구 지상 부근의 폭이 더 넓어진 것으로 봐, 완공 후 변모될 도심 명소의 변화에 깊은 관심과 기대가 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주거 공간과 환경이 투기의 대상으로 이미 탈바꿈해버린 현실에 와서는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울 살았던 몇 십 년간은 워낙 해외출장이 잦아 주거와 투기를 연결시킬 수 없었던 세월이었다. 그 시절 역시 주변의 많은 이들이 목숨을 걸고 관심 갖는 게 바로 개발 정보와 딱지, 그리고 뛰어 오르는 집값이었다. 직장생활에만 충실해야 했던 아내와 난, 짐짓 그런 소식에 무관심한 척 살았다. 아예 관념이 다른 사람으로 그렇게 살았다. 그 차이를 인식도 극복도 굴복도 하지 못한 채 여태껏 버티고 있는 자신이 무능력자인지도 모를 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인근의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가려고 하지 않았던가. 어린 시절부터의 소중한 추억거리가 있고 경외로운 생명과 삶에 대한 재인식을 다짐했던 곳, 주거지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인근의 편의시설과 아름다운 자연 환경, 그래서 더 높은 삶의 질과 품격을 유지할 이곳으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했다니. 더 나아가, 역세권의 호화로운 변신이 가져다 줄 횡재를 아무렇지도 않게 포기할 뻔 했다니. 자신의 무능력에 마지막 방점을 찍을 뻔했던 끔찍한 안도감에 옅은 실소를 연신 흘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 싱그러운 초록과 연두색 이파리를 둘러 쓴 배롱나무에 핑크빛 첫물이 터지고 있었다. 나무줄기에 매달린 푸른 잎새들의 모습이 베이지 색 매끈한 각선미에 청포도 무늬 치마를 두른 색시와 같이 아름다웠다. 거기에 루비처럼 빛을 발하는 꽃들의 모습이라니. 사람의 손이 부끄러워 위에서부터 찬란한 색의 향연을 시작하려는 듯 아직 손끝으로는 접근 불가였다. 배롱나무는 오래 전부터 담양의 명옥헌이 유명했다. 하지만 이곳의 배롱나무를 발견하고부터는 가끔일 뿐 거기까지 줄기차게 탐색해오던 습관을 버렸다. 도대체 이 영롱한 색과 빛의 잔치를 얼마나 많은 배롱나무가 이뤄내는지. 궁금하여 세어본 적이 있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귓가에 살랑거리는 바람 소리가 앞 다투어 환영하는 배롱나무들의 황홀한 속삭임이 되어 아쉽게 지나갔다. 몇 바퀴를 돌아도 피곤하지가 않았다. 총 육십 여섯 그루였다. 400여년의 장구한 세월을 변함없이 지켜오고 있는 명옥헌의 몇몇 낯익은 얼굴 보는 재미보다야 세련미 넘치는 젊음들과 함께하고 있는 이곳 운천저수지가 부족할 게 무어란 말인가. 더구나 여긴 시샘하여 피워대는 육십 여섯의 아름다운 자태가 머무는 곳. 핑크빛 한여름 밤, 꿈의 궁전이 바로 여기로다.

 

그런데, ‘그런데였다. 음수대 쯤 접근했을 때 뭔지 앞에 보이는 풍경이 주변과는 사뭇 달라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맑게 갠 하늘이었지만 햇빛은 이제 약했고 엷은 바람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갈 정도로 살랑거렸다. 간밤의 비바람 탓에 목재 탐방로는 말끔하게 치워져 있는데 한 그루 나무 밑동을 중심으로 누렇게 뭔가 포진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주변의 사물과는 확연한 대비를 이뤄 가까이 가 확인해보니, 철 이른 낙엽들의 무더기였다. 비바람에도 쓸려나가지 않은 채 시체처럼 내팽개쳐 있다가 따가운 햇살에 그대로 말라붙은 듯 보였다. 올려다보니 절반 정도의 나뭇잎 역시 황달기로 누렇게 뜬 몸을 뒤척거리다 이제 막 불어 온 실바람에도 힘에 겨운 듯 마침내 동료들 시신 위로 비장하게 몸을 던지고 있는 중이었다. , 벚나무였다. 한 철 이곳을 온통 화려하게 밝히며 많은 이들의 카메라 세례 속에서도 수줍은 미소를 잃지 않았던 왕벚나무가 아니었던가. 이제 그녀가 이유를 모른 채 중병을 앓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생각해봤지만 묘수가 없이 그저 관할 구청에 연락하는 일이 전부이겠거늘 하니 허망하기 짝이 없다.

 

한참을 자연 속 벗과의 교감을 현실로 착각한 채 애처로워 하다가 다시 생존으로 돌아와 보니 이제 또 만사가 독해진다. 운천저수지의 벚나무야 구청에서 잘 관리할 거고 나는 이곳 생활에 최대의 만족을 표현하며 또 날마다 열심히 걸을 것이다. (20210711)